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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머릿속에 남은 사이렌 소리가 아직도 머리를 웅웅 울린다. 기억이 희미하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을 본다. 에고 장비와 무기는 여전하고, 몸에도 이상이 없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어제를 끄집어내본다. 탈출한 환상체들, 사이렌, 알레프 급의 환상체가 이쪽으로 기어오는 모습, 그리고 끔찍한 고통. 자연스럽게 제 배를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도, 그 무엇도 없었다. 분명 치명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지럽게 풀린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같은 정보팀의 관리직 한 명을 붙잡았다.

“어제 무슨 일 있지 않았어?”
“센고쿠 씨? 아니. 아무 일도? 웬 일로 사무직도 안 사라지고 평화로웠지.”
“아냐, 분명 알레프 급 환상체가…….”
“하하, 무슨 소리야. 정보팀에는 알레프는 커녕 바브도 없다고. 악몽 꾼 거 아냐?”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고 사라졌다. 정보팀을 뛰쳐나가 안전팀으로 향하고, 다시 교육팀으로 향했다.

그 누구에게 물어도 그 사이렌 소리와 기어다니는 알레프 급 환상체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나만 그 시간을 기억했다.

기이한 현상은 그 날로 끝나지 않았다. 분명 죽었던 동료가 살아 돌아오거나, 있었던 환상체가 사라지고, 분명 23일이 지났는데 23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만, 오직 나만이 깨닫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미쳐가는 줄 알았으나, 생각을 고쳤다. 이건 기회다. 정보팀의 숙명이 뭐지?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이 현상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파헤칠 의무가 있다.

그 날 이후로 닥치는대로 정보를 모았다. 관리자의 방 문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이런저런 팀을 휘젓고 다니며 세피라들에게 꼬치꼬치 캐물어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하나 기이한 현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내 의사와 관계 없이 자꾸만 알아가는 게 생겼다. 방향은 전혀 달랐으나 알아가는 게 생기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나 그 불유쾌함마저 고려하고 있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이한 현상이 생길 때마다 무언가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결국 전부 알고 말았다. 이 회사에 대한 것, 관리자에 대한 것. 이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 다음 날이 의미가 없어지고, 생명에 대한 개념이 사라져갔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을 이용할 방법, 시간이 되감아지며 버려지는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 따위를 연구하다 보니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관리자의 명령 아래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다른 직원과 다르게,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온갖 불유쾌 속 유일하게 유쾌한 일이었다.

*

새로운 환상체가 들어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정보팀에 새로운 환상체가 들어와 직원들끼리 말이 많았다.

인간형 환상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 타입이라 모두가 앞다투어 그 환상체의 작업을 하고 싶어했으나 관리자의 명령 없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그들은 그 환상체를 바깥에서 흘끗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지루한 녀석들. 나는 휴게실 한쪽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마시던 커피를 전부 마셔버리고 그 환상체의 방으로 들어갔다.

‘센고쿠 료마 직원이 T-01-444 환상체에게 애착작업을 시작합니다.’

환상체는 조용히 앉아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보고된 사항으로는 이 환상체는 자인, 즉 가장 낮으며, 피해도 얼마 주지 않는 녀석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면 느긋하게 앉아 있어도 되겠군. 나는 벽에 기대어 그 환상체를 보다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T-01-444. 하하하, 이렇게 부르는 거 너무 정없나? 그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너, 이름 있어?”
“어차피 멋대로 부를 거잖아. 다들 그러는 거 알아.”
“다들? 다들 너를 뭐라고 부르는데?”
“류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환상체 녀석들과는 조금 다른 녀석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앉아 그를 마주보고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함을 연기했다.

“나는 센고쿠 료마야. 너도 있을 거 아냐, 네 이름. T-01-444도 아닌, 류겐도 아닌 네 이름.”

환상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더니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말끔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 녀석의 뒷배경이 좀 궁금한데. 어쩌다가 환상체가 된 거지?

“……쿠레시마 미츠자네.”
“미츠자네?”
“내 이름.”

환상체, 아니, 미츠자네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작업 시간이 끝나 이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츠자네 군, 다음에 또 봐. 또 올게.”

일순 그 환상체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서 확인하니 작업 결과는 매주 좋았다.

나는 관리자의 권한 없이 PE-BOX를 사용해 그의 정보를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T-01-444의, 즉 미츠자네의 정보가 바뀌었다. WAW급, 류겐.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거 봐, 얘 그냥 평범한 환상체일 리가 없다니까.

그 날 이후로 나는 미츠자네의 작업만 들어갔다. 애착 작업은 늘 좋은 결과를 냈고, 미츠자네는 내가 들어오는 게 점점 익숙해지는 건지, 점점 태도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곧잘 센고쿠 씨, 하고 부르기 시작하자 웃음마저 나왔다. 얘, 인간처럼 구네.

그 환상체를 이용할 방법을 찾으러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미츠자네가 준 시계 모양 에고 기프트가 손목에서 흔들렸다. 그 환상체를 이용해서 움직일 수 있다면, 조금 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조금 더 그의 격리실을 자주 방문했다. 하나 너무 많이 움직인 탓일까, 관리자가 내가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나를 다른 환상체가 있는 격리실에 배치하려 했다. 나는 관리자의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어떻게든 쳐다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 명령 듣는 거 안 좋아해, 관리자님. 알고 있잖아? 난 좋은 효율을 내고 있어. 당신이 날 방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나는 가만 웃고는, 미츠자네가 준 에고 기프트인 손목시계를 만지며 미츠자네의 격리실로 들어갔다.

‘센고쿠 료마 직원이 류겐 환상체에게 애착작업을 시작합니다.’

*

관리자의 견제를 받고 있는지, 내가 미츠자네의 격리실로 향하면 늘 다른 직원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관리자라는 사람은. 그가 머리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쪽도 머리를 쓰는 것으로 답해주기로 할까. 나는 휴게실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를 오가며 다른 직원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나오자마자 잽싸게 미츠자네의 격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애착작업은 늘 좋은 효율을 냈지만, 애착작업이 쌓일수록 미츠자네의 상태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업을 하는 직원을 따라 나가고 싶어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할까. 그 안에 있는 걸 갑갑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미츠자네는 한 번도 나를 따라 나온 적은 없었다. 작업을 하며 나오고 싶지 않냐고 몇 번을 속삭여도 선뜻 따라 나올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의 환상체 기록을 뒤지자 억압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서류를 뒤적이며 몇 번을 고민했지만 그를 그 격리실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키워드는 보이지 않았다. 서류더미 안에 파묻힐 듯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같은 정보팀 소속의 관리직이었다. 이름은, 뭐였더라. 여기서 그런 게 중요했었나.

“센고쿠 씨, 요즘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아서. 혹시 상담 프로그램이라도 필요한 거 아냐?”
“그런 건 필요 없어. 난 지극히 정상이야.”
“이봐, 요즘 정보팀 내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아? 네가 완전히 미쳐버렸다더라, 아무래도 엔케팔린 중독이거나 정신오염도가 너무 높아진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 같다더라. 그 외에도 수만가지 소문이 돌아.”

나는 이름도 잊어버린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환상체에게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게, 좀 더 연구하고, 좀 더 정보를 모으는 것뿐이야. 나는 ‘정보팀’ 소속이잖아. 내 할일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요즘 정보팀의 PE-BOX 효율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도 내 덕 아니었나?”
“그래, 다 네 연구 덕이지. 거기에는 다 감사하고 있어. 그런데 너 요즘, 류겐 환상체한테만 붙어 있잖아. 그를 연구하고 있는 거면 괜찮지만. 너 환상체한테 사적인 연민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 아니지?”

나는 그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서류더미를 정리했다. 그는 여전히 내 옆을 서성거리며 상담 프로그램이니 치료 병동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시끄러워. 생각 정리가 하나도 안 되네. 나는 그를 툭 밀치고 에고 장비를 챙기며 작업을 나갈 준비를 했다.

“센고쿠 씨, 오늘은 그냥 쉬어.”
“나한테 명령하지 마.”
“명령이 아니야!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야?”

나는 그를 보고 조소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방을 나서며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봐, 이 회사에 제정신인 사람도 있었나?”

‘센고쿠 료마 직원이 류겐 환상체에게 억압작업을 시작합니다.’

억압 작업을 하니 쿠레시마 미츠자네의 상태가 확실하게 나빠졌다. 역시 이게 키였나. 나는 들고 있던 차트에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뒤 격리실 바깥으로 나왔다. 클리포트 카운터 폭주까지 앞으로 하나. 관리자가 나를 막으려고 하는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카메라가 기민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조소하였다.

“관리자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 많은 직원이 죽으면, 더 많은 에너지를 모을 수 있어. 모르는 건 아니지?”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미츠자네의 격리실 앞에 섰다. 미츠자네는 작은 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불안정한 눈. 환상체보다는 인간을 닮은 저 얼굴. 환상체도, 인간도 아닌 듯한 저 낯. 그러면 너는 뭐지?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전지전능하고, 환상체라고 하기엔 감정이 너무 풍부해. 그러면 너는 뭐지?

……인간들을 구원하러 온 악마인가? 나는 미쳐있나?

‘센고쿠 료마 직원이 류겐 환상체에게 애착작업을 시작합니다.’

*

사이렌이 울린다. 녹빛 여명이 찾아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츠자네를 바라보며 차트를 들었다.

그는 의아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가지 않아?”
“너랑 있으려고 왔으니까.”
“아까처럼 답답한 건 싫어.”
“이번엔 그렇게 안 할게.”

나는 차트를 들고 그의 상태를 기록했다. 에너지가 모이는 효율은 좋은데, 상태는 불안정해져간다.

지금 이 순간, 류겐 환상체의, 쿠레시마 미츠자네의 에너지 효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평소처럼 네 이야기 해봐.”
“나가고 싶어. 답답해.”
“허어.”
“센고쿠 씨는 날 말리질 않네. 다른 직원들은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하면 나를 열심히 말렸어. 나가면 안 된다고.”

그의 나는 차트를 닫고 툭 웃었다. 한참 웃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있지, 미츠자네. 네 눈에 나는, 미쳐 보여? 아니면 네 눈에는 하염없이 사랑스럽게 보일까? 어느 쪽일지 모르겠네. 환상체의 머리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자, 나가자.”
“……괜찮아?”
“그럼.”

다음에는 네게서 에너지를 뽑아 저 바깥을 돌아다니는 시련들에게 접목시켜 내가 직접 신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몇 번이고 시간이 되감아져도 괜찮아. 나는 연구만 할 수 있으면 되거든. 쿠레시마 미츠자네는 머뭇거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와 함께 격리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관리자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당신이 보기에도 나는 미쳐 보여?

쿠레시마 미츠자네는 어느새 형태가 변해 있었다. 갑옷을 입은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는, 격리실에 있을 때와 다르게 불안정하고, 분노에 차 있고, 절박하고, 발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게 환상체의 폭주라는 건가.

곳곳을 돌아다니는 시련들 틈의 쿠레시마 미츠자네는 확실히, 구원을 행하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입술을 비집고 어떤 문장이 튀어나왔다.

……모르겠어? 이 회사에서는 죽음이 구원이야.

*

눈을 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화롭게 회사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책상 위,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서류를 하나 쥐고 글씨를 갈겨 썼다.

‘류겐 환상체에게 억압 작업을 한 후 애착 작업을 하면 환상체의 클리포트 카운터가 0이 된다. 이후, 탈출한다.’

또 다시 나만이 기억하는 비극, 나만이 알아채는 것들. 나만히 알아챈, 시간이 고쳐진 흔적.

나는 다시 격리실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내뱉었다. 환상체에게서 뽑아낸 에너지를, 시련에게 접목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격리실에 들어서기 전, 창문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쿠레시마 미츠자네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 어리고도 사랑스러운 초상. 얼마나 많은 구원을 낳을까, 너는.

……그의 불완전한 구원을, 나의 연구로 완전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머리 끝까지 희열이 차오른다.

‘센고쿠 료마 직원이 류겐 환상체에게 억압작업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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