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은 두 전사는 무엇을 깨닫는가>
※일러두기※
이 이야기는 특촬 <가면라이더 드라이브>의 엔딩, 드라마CD <드라이브 사가 가면라이더 마하 몽상전>의 이후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게임 <소닉 어드벤처 2>의 다크 사이드, 라스트 사이드의 엔딩을 다룹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캐붕, 설붕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001: 그 가면라이더는 어쩌다 우주 식민지의 잡일꾼이 되었는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X된’ 것 같다.
바른 말 고운 말, 바른 말 고운 말……입술로만 중얼거리며, 시지마 고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허전했다. 고우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불렀다.
“……히프노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린나 씨?”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꿈 속을 여행한 게 몇 번째였던가. 희망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으며 눈을 감은 게 몇 번이었지?
그러나 그 ‘꿈’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뭔가 이상했다.
아니, 애초에, 실험실에서 눈을 감은 게 마지막 기억이 맞던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침착하자, 침착해……고우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온통 잿빛에, 마치 커다란 로봇의 뱃속에 들어온 것처럼 무기질적인 벽이 눈에 들어왔다. 두어 명이 지낼 법한 2층 침대가 있었지만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투박한 방이었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살아도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창문도 없다니!
일단 여길 나가 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고우가 한쪽 벽에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 때,
“삑- 삑- 삑-”
“으아아악!!!”
갑자기 방에 있는 모든 비상등이 깜박거리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생체 반응이 닥터 에그맨 님의 데이터와 불일치, 생체 반응이 닥터 에그맨 님의 데이터와 불일치.”
“뭐? 닥터 뭐라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인 것 같기도 했지만.
나가야 하나? 싸워야 하나?
‘꿈 속에서는 변신할 수 있다’ 는 규칙을 상기하며 고우가 벨트를 소환하려 했다.
그 때,
“에잉, 귀찮은 놈들. 또 오작동이냐! 이 닥터 에그맨 님 말고 여기 인간이 있을 리가-”
투박한 발소리가 들리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들어온 사람이 고우와 눈이 마주쳤다. 거칠게 성큼성큼 걸어온 로봇 하나와 그 위에 타고 있는 인간 노인이었다.
“……”
“……”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닥터 에그맨과 고우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당신 뭐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왜 인간이 여기 있는 거냐!!!!!”
어디선가 버튼음이 나며 고우의 머리 위에 뭔가가 떨어졌다.
잠시 후, 고우는 팔짱을 낀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떨어진 감옥 안에.
“그~러~니~까~!!!”
고우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소리쳤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난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눈 떠보니 여기 있었다니까?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꿈’을 통해 여기 들어온 거라니까?”
“그 말을 누가 믿냐!!! 이 닥터 에그맨 님을 잡으려고 정부나 GUN에서 보낸 게 정말 아닌 이상, 여기 들어올 방법은 절대 없단 말이다, 꼬마!!!”
“누가 꼬마야! 이래봬도 성인이거든!”
그런데 방금 들은 ‘닥터 에그맨’ 이란 이름이 이상하게 귀에 익었다.
“당신, 닥터 에그맨이라고?”
“뭐냐, 꼬마.”
“그러니까 난 꼬마가-암튼, 난 이 ‘세계’에서 찾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만 찾으면 조용히 내 세계로 돌아갈 거야.”
“호오? 그게 누구지? 설마 소닉을 찾는 거면-”
“소닉? 그건 누군데? 아니, 잠깐만……”
소닉? 닥터 에그맨?
아까부터 에그맨의 이름을 듣거나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게 있었다.
기시감. 데자 뷰.
이 기시감이 ‘소닉’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더 심해졌다.
체이스를 찾아 꿈의 세계를 돌아다닐 때,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일지는 일종의 ‘룰’에 달려 있었다.
일단 두 사람 중 하나 이상이 ‘알고 있는’ 세계여야 했다. 굳이 그 세계에 가볼 필요는 없지만, 꿈에는 나올 정도로 ‘인식은’ 한 세계.
그리고 여러 꿈을 돌아다니며 깨달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아무래도 고우의 꿈이기 때문인지, 살아온 세월의 차이 때문인지, 체이스의 ‘세계’는 고우의 ‘세계’보다는 그 범위가 좁았다. 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우의 세계’라는 전체집합 안에 ‘체이스의 세계’라는 부분집합이 하나 속해 있는 느낌이다.
즉 아무리 고우가 ‘체이스의 꿈 세계’에 들어갈 일이 생겨도 그 세계를 고우가 모를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나, 당신 본 적 있어.”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당연히 본 적 있겠지, 전세계에 이 몸의 영상을 뿌렸으니-”
고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감옥 천장에 머리를 쎄게 부딪혔다.
“아야!!!!!”
얼얼한 머리를 어루만지며, 고우가 창살 너머로 ‘닥터 에그맨’을 가리켰다.
“당신, 게임 캐릭터지? 그 달걀! 파란 고슴도치한테 맨날 당하는!”
“누가 달걀이냐!!!!!! 꼬마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지 않느냐!!!!!”
“뭐래!!! 이름도 에그맨인 주제에!!!”
“에그맨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다!!! 나에게는 아이보 로보트닉이라는 이름이-”
“……”
“어이! 사람이 말하는데 어딜 보는 거냐, 꼬마!!!”
그러나 이미 고우의 귀에는 에그맨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이래서 바깥이랑 연락이 안 되는 거였다.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서!!!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뭐가 문제지? 어디서 꼬인 거지???
소닉. 소닉 더 헤지혹.
게임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고우도 그 이름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유명한 고슴도치.
어떤 게임회사의 마스코트 캐릭터. 어린 시절 키리코와 함께 게임을 해본 적도 있었다. 메가 드라이브였던가?
그런데 그 소닉은 대체 어디 가고, 어쩌다 이 동그란 악당 녀석의 아지트에 떨어졌단 말인가.
‘침착하자, 침착해, 고우……’
고우가 감옥에 쭈그려 앉은 채 머리를 감쌌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뭐지?
일단, 찾아야겠지. 체이스를.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인 이상 여기에 정말 그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찾아야 해.
그러려면……!
“당신, 닥터 에그맨이라고 했지?”
고우가 철창으로 바짝 다가가 에그맨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어디서 머리라도 다친 거냐?”
“난 멀쩡하거든?! 어쨌든, 그쪽의 닥터 에그맨 씨, 부탁이 있어.”
“뭐냐, 꼬마. 난 바쁘다.”
“천재 과학자라며! 그럼 사람을 찾아주는 것 정도는 되잖아! 난 그 사람을 찾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냔 말이다!”
“로이뮤, 아, 아니, 사람처럼 생긴 사람, 본 적 없어? 맨날 보라색 옷만 입고 다니는 녀석! 아니면 가면라이더라던가!”
“가면……뭐? 너, 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
에그맨이 수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모, 모르면 됐어! 암튼, 최근 이 근처에 인간은 없었던 거야? 나처럼 뚝 떨어진 녀석도 없고?”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여긴 아무나 들어오지도 못한단-”
“못 봤다고? 그럼 됐어! 당신 일에 간섭 안 할 테니까, 일단 날 여기서 내보내 줘! 다른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그럼 영~원히 여기 안 나타날 테니까!”
그러자 에그맨이 끼고 있는 고글 너머로 고우를 빤히 바라봤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뭐, 뭔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꼬마,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여긴-”
“이제 네놈이 돌아갈 곳은 없다, 인간.”
제3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고 몸집이 작은 생명체가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귀가 뾰족한 게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서히 다가오는 걸 멍하니 보던 고우는 그의 머리 뒤에 뾰족한 가시가 여러 개 돋아나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누구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녀석이 에그맨을 똑바로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임무 완수했다, 닥터. 그 파란 고슴도치를 발견했지만, 탈출을 우선시해서 처단하지는 못했다.”
“상관없다, 섀도우! 우리에게는 그 녀석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까! 어서 들어가 쉬도록. 좀 이따가 또 부르게 될 거다.”
“알겠다.”
‘섀도우’라 불린 녀석이 뒤로 돌아 나가려다 말고 고우를 힐끗 쳐다봤다.
왠지 소름이 끼쳤다. 그 녀석이 고우를 보는 눈빛에는 싸늘한 증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담겨 있지 않았다.
특정인을 향한 증오라기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분노와 증오에 가까워 보였다.
뭐야, 저 녀석. 고우가 다시 에그맨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이 뭐야? 여기가 어딘데?”
“너, 뉴스도 안 보냐? 아니면 진짜 다른 세계에서 온 거냐?”
에그맨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난 지금 꿈 속에 들어온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들이랑은-”
“아~됐고됐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바쁘다, 꼬마. 네가 진짜 ‘다른 세계’에서 온 거면 나름대로 연구 소재는 되겠지만, 그것도 다 나의 원대한 계획을 완수한 후다! 그 때까지는 여기에 조용히 갇혀 있도록. 섀도우 말대로 네녀석이 살 곳은 이제 없겠지만, 여기 있는 동안 밥 정도는 주마.”
“무슨 헛소리야!!! 난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
“정말 말 안 통하는 녀석이군.”
갑자기 에그맨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수많은 로봇들이 순식간에 고우가 갇힌 철창 주위를 둘러쌌다.
“뭐, 뭐야-”
“쫑알쫑알 시끄러운 녀석이군. 죽일 생각까진 없었지만, 이것도 다 네 업보다.”
“이게 무슨……! 웃기고 있네. 내가 조용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고우가 에그맨을 노려보며 한쪽 손을 배 쪽으로 가져갔다. 언제 나타난 건지 익숙한 벨트의 감각이 느껴졌다. 다른 쪽 손에도 익숙한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시그널 바이크였다.
고우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Let’s……변신.”
“뭐, 뭐냐!”
고우가 있던 곳이 번쩍거리며 빛났다. 그 빛 속에서 경적과 총 소리가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그맨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니, 시지마 고우가 있던 자리에는 하얗고 늘씬한 가면라이더, 마하가 서 있었다.
철창은 창살 하나하나에 구멍이 뚫린 채 부서져 있었다.
가면라이더 마하가 외쳤다.
“추적, 박멸, 어디든지-마하! 가면라이더 마하!!!”
그가 든 슈터에서 마치 불꽃놀이처럼 푸른 빛이 튀어나오더니 에그맨의 로봇들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에그맨이 뒤로 물러섰다.
로봇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쓰러지기가 무섭게, 에그맨의 눈앞에 마하가 섰다.
그의 미간에 슈터를 똑바로 겨눈 채였다.
“어, 언제……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 너!”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나도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자, 어서 날 여기서 내보내 주실까?”
“호오, ‘마하’라. 몸풀기 정도는 되겠군.”
“뭐-”
“카오스-컨트롤!”
저 멀리서 ‘섀도우’의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순식간에 그 기척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니,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마하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뭐야, 위험하잖아! ……!”
뭔가 이상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에그맨 말고 다른 생명체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지금 에그맨의 앞을 가로막고 선 섀도우의 기척은 더더욱.
뭐 하는 녀석이지, 저 녀석?!
“마침 잘 왔다, 섀도우. 저 녀석을 처단해라! 죽여도 상관없다.”
“알겠다, 닥터.”
“무슨 개소리를……내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아?!”
“카오스, 컨트롤!”
마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순식간에, 이번에는 섀도우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귀에 ‘퍽!’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마하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악!”
마하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윽-”
“순간이동 기능은 없는 모양이군. 누가 만든 기계인지는 몰라도 한심하다.”
섀도우가 마하의 몸을 밟으며 차갑게 말했다.
마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빠른 이동……되거든……? 그리고 난 기계가 아냐. 가면라이더라고!”
“흥, 관심없다.”
섀도우가 그의 몸을 발로 세게 짓눌렀다. 저 작은 몸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웬만한 로이뮤드보다도 강한 것 같았다.
“으윽-”
“잠깐, 섀도우.”
“뭐지, 닥터.”
에그맨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 녀석은 살려두지.”
“흥, 꼴사나운 변덕이군.”
“시끄럽다. 넌 들어가서 쉬기나 해라.”
섀도우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군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인간을 연구해본 적은 없지만 계획이 끝난 후, 잠깐의 여흥거리 정도는 될 거다.”
“콜록콜록, 뭐……하려는……”
차가운 집게 같은 것이 마하의 손에 들려 있던 슈터를 빼앗았다.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에그맨(이 탄 로봇)이 마하의 몸을 돌려 눕히더니, 시그널 바이크가 들어가 있는 슬롯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변신이 풀린 고우의 허리에서 벨트를 벗겨냈다.
“이러면 더 이상 난동은 못 피우겠지.”
“무, 무슨 짓이야. 돌려줘-”
몸을 반쯤 일으키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가 고우의 목 뒤를 세게 내리쳤다. 섀도우의 손날인 것 같았다.
윽, 한 마디의 신음과 함께 고우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렴풋이 에그맨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둬 놓으면 심심할 테니, 잡일꾼 정도는 시켜 주마. 물론, 이것들은 내가 잘 보관해 두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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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궁극생명체가 증오하지 않는 인간은 누구인가-
망했다.
요즘 계속 이런 생각만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망했다.
일단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스페이스 콜로니 ARK. 지구도, 달도 아닌 곳에 떠 있는 일종의 대형 인공위성.
처음 커다란 창 너머로 이 세계의 지구를 발견했을 때,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완전히 망했다는 걸.
그나마 긍정적인 사실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된 고우를 이곳 ‘스페이스 콜로니 ARK’ 사람들, 그리고 로봇들이 적대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 였지만.
에그맨은 까칠했지만 그래도 인간은 인간인지(솔직히 고우는 저런 체형의 인간이 제대로 걸을 있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고우에게 기본적인 건 제공해 줬다. ‘잡일꾼’ 이랍시고 진짜로 간단한 청소나 조수 일을 시키긴 했지만, 상사로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할까. 의외로 허술한 사람인지, 고우는 청소하는 척하며 슈터와 벨트, 시그널 바이크가 어디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항상 에그맨이 상주 중인 작업실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중에 만나본 그들의 세번째 동료, 루즈 더 뱃은 꽤 살갑게 구는 편이었다. 이 넓은 ARK 안에서 마주친 건 두어 번 정도였지만, 어쩌다 마주치면 눈을 찡긋거리며 능글맞게 말을 걸어주곤 했다. 이곳의 이름이 ‘ARK’이고 에그맨의 목표가 뭔지, 자신과 섀도우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준 것도 루즈였다. 박쥐인 루즈는 트레저 헌터고, 고슴도치인 섀도우는 50년쯤 잠들어 있던 걸 에그맨이 깨운 ‘궁극생명체?’ 라나 뭐라나. 세상에 동물이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의사소통도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섀도우 더 헤지혹은……사실 고우의 눈에는 이 녀석이 가장 미스터리한 녀석이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철천지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고우를 노려보고는 그냥 사라져 버렸으니.
늘 ‘뭐야, 저 녀석’ 이라고 생각하며 넘기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 녀석을 볼 때마다 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슷하단 말이지. “그 녀석” 이랑.
고우가 한 50년은 안 쓴 것 같은 벽장의 먼지를 털며 생각했다.
에그맨이 ‘세계 멸망(고우는 이 계획을 듣자 마자 본능적으로 변신하려 했지만 벨트가 없다는 슬픈 현실만 깨닫고 일단 단념했다.)’까지 남은 시간 동안 고우를 ‘잡일꾼’으로 부리긴 했어도, 사실 고우가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지, 변신 못하는 고우는 무방비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둘 다인지는 몰라도 고우가 이 넓은 ARK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걸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우는, 남은 시간을 탐색과 ‘취미 생활’에 썼다.
꿈이라는 건 참 편한 세계였다.
존재는 해도 소유권을 빼앗긴 벨트를 다시 소환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고우의 카메라는 소환해서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그러나 ‘탐색’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ARK에는 사람을 찾는 기능이 없었고, 있어도 에그맨이 사용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사용할 수 있어도 과연 로이뮤드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 고우가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지만 역으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었다.
만약에. 체이스도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도 고우를 찾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찾는다고 해도……이곳에 올 수 있을까? 고우가 카메라를 꼭 쥐었다.
“수동적이네, 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항상 그랬다. 언제나 체이스가 먼저 고우를 찾아오곤 했다. 고우가 굳이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밀어내기까지 해도, 항상 그는 고우의 곁에 있었다. 늘 옆에 있는, 솔직히 말하면 성가신 존재라 생각했기에 소중함도 몰랐었다.
그렇게 계속 다가오다가, 너는……!
고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찌어찌 외운 바에 따르면 현재 고우의 옆방은 커다란 베란다 같은 방이었다. 한쪽 벽이 커다란 유리로 덮여 있어 거의 항상 지구를 볼 수 있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전혀 예상 못했던 사람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섀도우?”
“……”
섀도우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작은 사진 같았다.
문득 섀도우의 검은 몸이 한없이 푸르고, 밝은 배경을 등지고 서 있는 게……
‘아름답다……’
고우가 슬그머니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뭐냐.”
“어, 미, 미안……”
섀도우가 고개를 돌려 고우를 노려봤다.
이대로 나가기에도 뭔가 뻘쭘해져서, 고우는 그냥 섀도우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섀도우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감췄다. 얼핏 어떤 소녀와 노인의 흑백 사진이 보였다.
“미안. 사진으로 찍으면 멋질 것 같아서. 기분 나빴으면 지울게.”
“흥, 멋대로 해라. 어차피 너도 곧 죽을 테니.”
“그러니까, 난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그리고-”
‘정말 여기가 게임 세계면, 소닉이 와줄 테니까!’ 라고 하려다가, 그만뒀다.
계속 궁금한 게 있었다. 고우는 섀도우 옆에 앉았다.
“저기, 왜 그렇게 나를, 아니, 인간을 싫어하는 거야?”
섀도우가 고우를 노려봤다.
“그 정도는 알려줘도 되잖아?”
“어차피 죽을 놈에게 가르쳐줄 의리는 없다. 닥터만 아니었으면 네놈도 죽였을 테니.”
섀도우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너도 나랑 비슷하구나?”
“……”
“소중한 사람이지? 그 사진에 있던 사람들.”
고우가 여전히 창 너머의 아름다운 행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섀도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네놈……무슨 소리를-”
“네 마음을 100% 알겠다고는 못하겠지만, 나도 있거든. 그런 사람.”
고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 사람, 널 지키다가 죽은 거지? 그 녀석도 그랬어. 너처럼 인간이 아닌데, 날 지키다가……”
고우가 어느새 손에 쥐어진 시그널 바이크를 더 꽉 움켜쥐며 말을 흐렸다. 그 새카맣게 타버린 시그널 바이크는 고우의 것이 아니었다.
“너랑 나는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굳이 말은 안 할게. 너도 기분 나쁠 테고, 내 복수는 이미 끝났으니까.”
“……”
“너도 복수하려는 거지? 그 사람을 죽인 인간들한테.”
“……”
“난 다른 세계 사람이라,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그래서 너 대신 복수하는 것도, 막는 것도 못하지만……”
새까만 시그널 바이크를 고통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복수면, 그 후에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게. 진심으로.”
“쓸데없는 소리다.”
섀도우의 발소리가 멀어지며 사라졌다.
한참 후, 고우가 그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손에 쥔 시그널 바이크를 살살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진짜 닮았네. 너랑.”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섀도우가 완전히 사악한 녀석은 아니라는 걸. 그런 점까지 저렇게 꼭 닮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이곳에 온 건……
고우는 한참 동안 창 너머의 지구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사진을 찍을까, 도 생각했지만 카메라보다는 사람의 눈으로 담아두고 싶었다.
아직 이 세계는 너무나 생소했다. 소닉 게임에 섀도우나 루즈 같은 녀석들이 존재하긴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으니 검색도 안되는걸.
그래도 루즈에게 들은 게 있었다. 50년 전, 섀도우는 이곳에서 닥터 에그맨의 할아버지에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진 속 노인이 그 사람이겠지. 얼핏 보기에도 에그맨과 똑닮은 콧수염이 있었으니. 옆에 있던 소녀는……글쎄, 섀도우의 친구려나? 아마 그 두 사람이 섀도우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50년 전의 섀도우가 이곳에서 그 노인 혹은 소녀와 함께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봤던 나날도 있었겠지.
저렇게 꽉 막히고 차가운 녀석이 오래된 사진까지 들고 다닐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면, 복수심을 품은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됐다.
제아무리 가면라이더라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가면라이더라지만, 시지마 고우 본인도 손이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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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손이 더럽혀진 전사는 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가-
“삑- 삑- 삑- 비상 사태 발생, 비상 사태 발생, 침입자 반응 다수 확인, 침입자 반응 다수 확인-”
“우왓!!!”
멍하니 앉아 있던 고우가 펄쩍 뛰었다.
그러나 비상벨은 이내 꺼졌다.
뭐지? 이번에는 진짜 오작동인가?
그래도, 이곳 ARK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신호가 잡힌 건 고우 이후로 처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에그맨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뛰었다.
“헉!”
에그맨이 보이는 방에 들어가려다, 고우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방에 에그맨 말고 다른 사람, 그러니까 두 발로 걸어다니는 동물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에그맨이 총을 겨누고 있는 분홍색 생명체도 포함해서 셋 정도.
슬쩍 엿보니 다른 둘은 모르겠지만, 한 명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뒷모습만 봐도 그 파랗고 가시가 삐죽삐죽 난 녀석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소닉……!’
진짜로, 그가 있었다. 고우의 눈앞에. 정말 이곳은 소닉 게임의 세계였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방 안에서 들리는 대화가 조금 묘했다.
“자, 그럼, 소닉. 이 여자애가 죽는 걸 보기 싫으면, 어서 그 에메랄드를 여기에 올려 놓으실까.”
“……”
소닉 더 헤지혹이 천천히 에그맨 앞에 있는 자그마한 거치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보석을 꺼내더니 그 자리에 올렸다.
보석을 내려놓은 후, 소닉은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갑자기 그의 주위가 커다란 유리관으로 뒤덮였다. 소닉과 같이 온 녀석들이 소리쳤다.
“소닉!!!”
“그 가짜 에메랄드로 이 천재 과학자, 닥터 에그맨 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 그걸 어떻게!”
“방금 네가 인정하지 않았느냐, 꼬마여우 녀석!”
“아……!”
아까 소닉 옆에 있던, 파란 기체를 타고 있는 여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캡슐 안에 갇힌 소닉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뒷일은 부탁해, 테일즈. 그리고 에이미.”
소닉이 분홍색 고슴도치 쪽을 돌아봤다.
“……몸조심해.”
그 말과 함께 에그맨이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소닉이 담겨 있던 캡슐이 아래로 쑥 빠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가짜 에메랄드’와 함께 우주로 내던져진 것이다.
내던져진 캡슐이 창 밖에서 폭발했다.
“소닉! 안 돼!!!”
찢어지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에그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작별이다, 소닉 더 헤지혹. 내 영원한 숙적이여.”
‘에이미’라 불린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숨어서 전부 봐버린 고우는 몸을 떨었다.
충격이 심해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녀석은 그냥 평범한 고슴도치였군.”
“뭐-섀도우?”
언제 뒤에 서 있었는지, 섀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고우가 뒤를 돌아보자 섀도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방 안에서는 테일즈라 불린 꼬마여우가 ‘절대 용서 못해!’ 라고 외치며 에그맨과 대치하고 있었다.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제아무리 꿈 속, 게임의 세계라지만 인간의 몸으로 우주에 떨어진 소닉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폭발까지 했으니.
그 때, 다시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침입자 2체 발생, 침입자 2체 발생, 현재 2번 데크에서 이동 중, 반복한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2체 중 1체에 생체 반응 없음, 2체 중 1체에 생체 반응 없음-”
쾅! 뭔가 내려치는 소리가 나며 방송이 꺼졌다. 에그맨이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에잇, 귀찮게! 난 바쁘니 알아서 처리해라, 나의 로봇들이여!”
“뭐라고……!”
귀를 의심했다. 어쩌면 이 ‘2체’ 중 하나는 그 폭발에서 어떻게든 살아난 소닉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하나가 왠지 걸렸다. 생체 반응이 없는 녀석이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 고우는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설명이 좀 묘했으니 진짜 오작동일 수도 있었지만, 확인은 하고 싶었다.
문제의 복도에 도착했을 때, 고우는 눈을 의심했다.
“소닉?”
그러나 그 자리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소닉 더 헤지혹에게는 고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섀도우가 그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섀도우가 소닉에게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넌 날 놀라게 하는 걸 절대 멈추지 않는군, 파란 고슴도치. 네가 있던 그 캡슐은 우주에서 폭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흥, 네 방법을 조금 따라해 봤을 뿐이야.”
소닉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눈은 섀도우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게임을 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소닉 더 헤지혹이 어떤 캐릭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왠지 든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고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다……살아 있었구나.”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고우.”
“아, 깜짝이야! 있으면 기척이라도 좀 내-어?”
반사적으로 평소 자주 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특정 “누군가” 에게 자주 쓰던 말이!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고우가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마치 목에 녹슨 톱니바퀴가 붙은 것처럼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맙소사. 진짜였다. 시지마 고우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서 있었다. 꿈의 세계를 몇 번이고 돌아다니며 계속 만나고, 평소 고우의 꿈에도 자주 나타나는 사람이지만……그래도 이 만남은 늘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기쁨, 슬픔, 희망, 절망, 말 그대로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단정한 얼굴에 보라색 라이더 자켓을 입은 청년이 그 자리에 서서 고우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야, 너……”
“여기서는 오랜만에 보는군, 고우.”
체이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고우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오랜마안? 오오래앤마안????? 오랜만은 개뿔! 처음이겠지! 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그러나 체이스가 입을 열려 한 순간, 그들의 반대쪽 복도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뭐, 뭐야!”
고우가 소리쳤다. 체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작됐군.”
“뭐가?”
“고우, 너도 알겠지만, 여긴 게임의 세계다. 지금 저 녀석들은 보스전을 하고 있는 거다.”
“하아? 보스전?”
“여기 있으면 방해가 될 거다.”
체이스가 고우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고우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소닉과 섀도우가 싸우고 있는 복도의 바로 위층이었다.
체이스가 손을 놓자마자 고우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
“그래서? 너, 여기가 어떤 세계인지 아는 거야?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진정해라, 고우. 내가 아는 한에서 설명해 줄 테니까. 먼저, 이 세계는 ‘소닉 어드벤처 2’의 세계다.”
“소닉……뭐?”
“그리고 여긴 네가 아니라, 내가 아는 세계다. 내가 이 게임을 해봤기 때문이다.”
“오 마이 갓……”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 이름도 모르는 게임 세계에서 한 개고생이 이 녀석 때문이라니! 당장 체이스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네가 이 세계에 들어온 건, 소닉의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소닉 어드벤처 2’의 사건들이 진짜로 일어났었다. 그리고 네가 떨어진 곳은 다크 사이드 스토리의-”
“아니, 저기, 일단 알았어. 말 끊은 건 미안한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래서? 넌 여길 어떻게 나가는지 알아? 지금 바깥이랑 전혀 연락이 안 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진짜 실험하다 여기 떨어진 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이거, 진짜 내 꿈일지도 몰라.”
고우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초조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걸, 체이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허탈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안심한 건가? 자신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을 드디어 만난 거니까.
잠시 뭔가 생각한 후,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고우. 나도 네가 어서 탈출하길 바라지만, 여기서 나가는 정확한 방법은 모른다.”
“뭐……뭐라고?!”
“얘기는 끝까지 들어라, 고우. 지금 당장 나갈 방법은 모르지만, 난 이 게임을 해봤기 때문에 알고 있다.
이 ‘소닉 어드벤처 2’의 스토리는 조금 있으면 끝나게 되어 있다. 소닉과 섀도우의 ‘보스전’이 각 사이드의 마지막 보스전이기 때문이다.”
“끝나……? 그럼, 난, 아니, 우리는 어떻게 돼?”
“저 녀석들의 보스전이 끝나면, 진엔딩 루트인 ‘라스트 사이드’가 열리게 되어 있다. 아마 그 때 네 꿈도 자동으로 끝날 거다. 이 게임의 엔딩은 하나뿐이니까.”
“그럼……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체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지금 당장 이 꿈을 끝내고 싶다면,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는 있다.”
그 말과 함께, 체이스가 갑자기 브레이크 건너를 꺼냈다. 고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야, 너 지금 뭘 하는-”
“너도 꺼내라, 고우.”
고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지금,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
“그것도 가능성 중 하나라면.”
체이스가 건너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이미 전투 직전의 그것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고우가 머뭇거렸다.
“뭐 하는 거냐, 이미 한번 소환하지 않았나?”
고우가 슈터를 꽉 쥐었다. 아까 에그맨의 작업실에서 슬쩍해온 참이었다.
“……꼭 이래야 해?”
“게임에는 항상 어떤 ‘조건’이 있다. 그리고 유저는 그 조건을 찾아야 한다. 그게 게이머의 룰이니까.”
“너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게임에……아냐, 됐다. 네 말대로, 할 수 있는 건 해 봐야지.”
고우가 시그널 바이크를 들어올렸다.
“Let’s, 변신!”
두 사람의 구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가면라이더 마하, 시지마 고우가 씩씩거리며 눈앞의 상대를 내려다봤다. 까맣게 타버린 시그널 바이크가 이미 고우의 손에 ‘존재’하기 때문인지, 가면라이더가 아닌 마진 체이서로 변신한 체이스는 그 앞에 주저앉은 채 마하를 빤히 올려다봤다.
어느새 주위는 조용해져 있었다. 체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스전’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여전히 씩씩거리며 마하가 고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체이서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너, 솔직히 말해. 일부러 져준 거지?”
“……”
마하가 변신을 풀고 고우로 되돌아왔다. 그의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고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지는 게 조건이면 어쩌려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고우.”
체이스 역시 변신을 풀었다.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너야말로 일부러 적당히 한 거 아닌가?”
“누가 할 소리를! 내가 너랑 한두 번 싸워 보는 줄 알아?!”
“그러는 너는, 왜 계속 내 약점을 피했지?”
“무슨……!”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네 말대로, 우린 여러 번 싸워본 사이다. 그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네가 방어만 했다는 걸?”
“그건-”
“고우, 여긴 게임 세계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레귤러지만, 만약 여기서 둘 중 하나가 ‘주인공’이라면 그건 너일 거다. 내가 아니라.”
“……무슨 소리야?”
고우가 눈썹을 찡그렸다. 체이스가 고우에게 건너를 마주 겨누었다
.
“게임은 선이 악을 무찔러야 끝난다. 이 세계의 선은 소닉이겠지. 악은 섀도우일 테고. 그렇다면, 우리를 분류했을 때 내가 악역일 건 당연한 소리 아닌가.”
“헛소리하지 마! 네가 악역일 리가 없잖아! 너도, 섀도우도-”
순간, 눈앞에 섀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들고 있던 사진도……! 고우가 슈터를 내렸다.
“……넌 틀렸어, 체이스. 이 세계에는 선역도, 악역도 없어.”
“……”
“너, 내가 왜 치명타를 안 때렸는지 알아?”
“인정하는 건가.”
“시끄러! 내가 진짜로 널 해칠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
고우가 슈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무리 여기가 꿈 속이라 해도, 넌 절대 안 건드려. 절대로! 차라리 그놈의 엔딩을 기다리고 말지.
네가 다치는 걸 내가 가만둘 것 같아?! 넌 네 맘대로 해. 난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하지만 고우-”
그 때였다.
콰앙!!!!! 복도 전체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뭐, 뭐야!!!”
고우가 얼른 체이스와 등을 맞대고 섰다.
흔들림이 차차 잦아들었다. 고우는 바닥에 내팽개친 슈터를 집었다. 등 뒤에서 체이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스트 사이드에 돌입한 거다. 조금 있으면 최종 보스전이겠지.”
“아, 그 게이머 말투 진짜 적응 안 되네! 암튼, 조금 있으면 엔딩이란 거지?”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다.”
또다시 굉음이 울렸다.
“우와아……! 설마 여기,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여긴 위험하다.”
흔들림이 잦아들자 체이스가 다시 고우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새삼 이 녀석이 이 게임을 해본 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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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자신을 불태운 전사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주위가 온통 시끌벅적했다.
온 사방이 비상등으로 번쩍거렸고, 화면을 송출하는 모든 기기가 웬 노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노인은 계속 똑 같은 말을 했다.
“……나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모두 빼앗아간 인간 놈들. 네놈들도 내 절망을 똑같이 느껴봐라……”
“저 사람이 제럴드 로보트닉이다.”
“로보트닉?”
“닥터 에그맨의 할아버지고, 섀도우를 만든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러고 보니 에그맨과 꽤 닮은 얼굴이었다. 또 어디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 있던 사람인가?”
“고우?”
“어, 아무것도 아냐.”
고우가 중얼거렸다.
“절망이라……”
이 사람이 섀도우를 만든 자라면, 섀도우가 그렇게까지 인간을 증오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체이스가 고우의 어깨를 잡았다.
“고우, 허튼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인간을 ‘지키는’ 가면라이더다. 모든 인간을 죽이는 일에는 동참할 수 없어.”
“무슨 소리야, 그건 나도 알거든? 가자.”
가장 시끌벅적한 방에 들어서자, 이미 에그맨과……아까 ‘테일즈’라고 불렸던 작은 여우가 커다란 기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체이스??? 너 어디 있었어? 오자마자 너만 사라져선-어,”
테일즈가 둘을 돌아보며 반색하다가 고우와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런 시선에 어색해진 고우가 체이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테일즈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네가 찾던 ‘친구’가 이 사람이야? 드디어 만났나 보네!”
“그렇게 되었다. 여기 있었다고 하더군.”
“정말? 다행이다!”
테일즈가 고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꼬리는 2개였다. 그러고 보니 소닉 게임에 늘 소닉을 따라다니던 캐릭터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얘인가?
“만나서 반가워, 고우! 난 마일즈 프라우어! ‘테일즈’ 라고 불러 줘!”
“어……반가워, 테일즈.”
고우가 그의 눈높이를 맞춰 앉으며 손을 잡았다.
“내 이름도 알아?”
“체이스가 네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가 사막에서-아, 이럴 때가 아니지.”
테일즈가 얼른 작업하던 곳으로 달려갔다.
“미안해, 두 사람. 지금 너무 바빠서! 좀 도와줄래?”
“뭘 도우면 되지?”
테일즈가 체이스를 돌아봤다.
“지금 소닉이랑 너클즈가 코어에 있는 ‘제단’을 찾으러 갔어. 그 애들을 도와줄래? 그리고 탈출용 비행선을 개조하는 중이야. 쓸 만한 재료가 있으면 좀 가져다 줘. 무거우면 우리가 갈 테니까 연락하고.”
“알겠다. 가자, 고우.”
“어? 어……”
얼떨결에 떠밀려서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이제 조금 있으면 그 ‘라스트 스토리’가 끝난다는 거지?”
“그렇다. 하지만 상황을 잘 보려면 소닉한테 가는 게 좋을 거다.”
“그, 그래……”
진짜 적응 안 되네, 저 말투.
그 때, 고우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왜 그러지, 고우?”
“쉿, 잠깐만.”
무심코 지나치려던 방문 중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고우는 얼른 기억을 쥐어짜냈다. 이 방은……저번에 섀도우를 봤던 그 방이었다.
살짝 들여다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섀도우……”
“고우, 네가 그러지 않아도-”
“잠깐이면 돼.”
체이스가 말리는 걸 보니 지금의 섀도우는 그냥 놔둬도 될 것 같긴 했다.
그치만. 그래도……! 고우는 문을 열었다.
“섀도우.”
“……”
“역시, 너……복수를 끝내려는 거구나.”
“조금 있으면 끝이다. 저 인간들도, 네놈도.”
섀도우는 고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증오도, 분노도.
지금의 그에게서는 뭔가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다.
고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알았어. 나도 널 안 말려. 어차피 난 그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고우, 잠깐만.”
“아, 잠깐이면 된다니까?”
체이스가 고우를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관여하면 안 된다.”
“그치만-”
고우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체이스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러더니 섀도우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아는 다른 인간들처럼, 마리아의 마음에도……”
“……”
“‘사랑’은 존재했을 거다. 그것만은 알아 둬라.”
“……체이스?”
“가자, 고우.”
체이스가 고우의 손을 잡아 끌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때문인지 섀도우가 뒤를 힐끗 돌아봤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제단을 향해 걸으며, 고우가 물었다.
“방금 그 말은 뭐야? 관여하면 안 된다면서?”
“섀도우를 설득하는 건 우리 역할이 아니다.”
“뭐? 근데 넌 왜-”
체이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뭔가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널 멈추려고 한 거지만, 그 말은 나도 모르게 한 것 같다.”
“하아???”
“정말이다.”
“아니, 못 믿겠다는 건 아닌데……”
어쩐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서, 고우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섀도우를 떠난 직후, 에이미가 투덜거리며 그쪽으로 오고 있었다는 건 조금 더 나중에 시지마 고우가 알게 된 사실이다.
“Yo! 여긴 웬일이야?”
ARK의 코어에 있는 ‘제단’을 어찌어찌 찾아가자 파란 고슴도치, 소닉과 빨갛고 머리가 길며 완고하게 생긴 녀석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아마도 이 녀석이 너클즈인 것 같았다.
체이스와 소닉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부딪혀 하이파이브를 했다. 고우는 속으로 ‘와우’ 라고 중얼거렸다. 서로 놀라지 않는 걸로 보아, 아까 컴퓨터가 얘기했던 ‘침입자 두 명’ 중 하나는 살아 돌아온 소닉이 틀림없었다.
“테일즈가 널 도우라고 해서 왔다.”
“오~그래? 근데 여긴 딱히-”
“소닉!”
땅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제단에서 제랄드 교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간 놈들. 네놈들도 내 절망을 똑같이……”
“갸아아아!!!!!”
괴성과 함께 땅에서 뭔가가 솟아올랐다. 등에 뭔가 인간의 폐처럼 생긴 걸 주렁주렁 짊어진 거대 생명체였다. 몸에 호스 같은 게 달라붙어 있다는 것만 빼면 어딘가 공룡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저 녀석이……봉인된 궁극생명체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너클즈가 중얼거렸다.
소닉이 나머지 셋을 돌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Hey, Guys! 둘로 나뉘자. 난 저 녀석을 상대할게. 체이스, 너는 너클즈를 호위해 줘! 그리고……네가 고우?”
“어……반가워?”
눈이 마주친 고우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소닉이 크게 윙크했다.
“Nice to meet you, too! 어쨌든, 너도 너클즈랑 같이 가는 게 좋겠어. 여긴 내가-”
“저 놈은 내가 맡겠다.”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섀도우가 그들을 지나쳐 갔다.
“저 놈은 내가 상대하겠다. 그 동안 너희는 카오스 에메랄드를 멈춰라!”
“Hey! 너 혼자만 멋진 역할 하려고? 어쨌든, 여긴 우리가 맡을게. 너희 둘은 너클즈랑 같이-”
“아니, 난 너희를 호위하겠다. 고우, 너클즈를 부탁한다.”
“잠깐만!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고우가 태클을 걸자, 체이스는 새삼스러운 걸 다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나보단 네가 더 빠르지 않나.”
“뭐? ……아, 그런가. 가자, 너클즈. Let’s, 변신!”
“어이, 난 호위 따위 필요 없다고-”
너클즈가 소리치는 순간, 이미 그곳에 고우의 모습은 없었다. 가면라이더 마하가 너클즈를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어이, 너도 변신할 수 있는 거였-어이!!!”
“저기로 올라가면 된다는 거지? 간다!”
하얀 빛이 괴물을 피해 제단으로 돌진했다. 뒤에서 소닉이 휘파람을 불며 소리쳤다.
“Hoohoo~!!! 진짜 빠르잖아!!! 너 나중에 나랑 경주하는 거다?”
“갸아아아아아!!!!!”
프로토타입 궁극생명체 ‘바이오리자드’가 남겨진 셋을 공격한 건지,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제단이 흔들렸다.
마하는 위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를 쏘아 맞추며 재빨리 제단 꼭대기에 다다랐다.
제단 주위를 일곱 개의 큼직한 보석이 둘러싸고 있었다. 너클즈가 제단 중앙으로 걸어가며 거대한 보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올려놓으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행하는 것, 그것은 일곱 개의 혼돈. 혼돈은 힘, 힘은 마음에 따라 강해지는 것. 억누르는 것, 그것은 혼돈을 하나로 모으는 것! 부탁해, 마스터 에메랄드! 카오스 에메랄드를 멈춰!!!”
마스터 에메랄드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눈부신 빛이 솟아올랐다. 제단 아래에 있던 프로토 궁극생명체를 고차원적인 빛이 감싸더니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다?!”
마하와 너클즈가 동시에 외쳤다.
“카오스 컨트롤인가?”
어느새 제단으로 올라온 섀도우가 말했다.
그 때, 다시 제단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무너질 것처럼 강한 지진이었다. 너클즈가 소리쳤다.
“뭐, 뭐야? 카오스 에메랄드를 멈췄으니까, 이제 낙하도 멈추는 거 아니었어?”
“프로토타입은 아직 살아 있다! 녀석이 스페이스 콜로니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어디선가 방송이 흘러나왔다. 에그맨의 목소리였다.
“스페이스 콜로니에 기생해서, 지구를 향해 추락할 생각이다!”
“말도 안 돼……기껏 멈췄는데……!”
“소닉!!!”
너클즈가 소닉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소닉이 결의에 찬 눈으로 섀도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섀도우도 소닉의 얼굴을 보더니, 뭔가 알겠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다가온 마진 체이서가 마하의 팔을 잡아 끌었다.
“고우, 이제 나가야 한다.”
“뭐? 왜?”
“너클즈, 너도 같이 가야 한다.”
“어, 응.”
“갑자기 뭔데! 쟤네는 어쩌고-우왓!”
세 사람이 제단을 벗어나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카오스 에메랄드 7개가 소닉과 섀도우의 주위를 감싸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클즈를 다시 어깨에 짊어진 채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면서, 마하는 제단 쪽을 돌아봤다. 제단이 아까의 마스터 에메랄드보다도 밝은 빛을 뿜으며 두 줄기 빛이 솟아올랐다.
세 사람이 방을 나가는 순간, 두 줄기의 강렬한 빛이 그들을 휙 스쳐 지나갔다.
슈퍼 소닉, 그리고 슈퍼 섀도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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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살아남은 두 전사는 무엇을 깨닫는가-
다시 테일즈와 에그맨이 있던 방으로 돌아오니, 두 줄기의 빛이 창 밖에서 스페이스 콜로니를 짊어진 뭔가와 싸우고 있었다.
“이게……”
“최종 보스전이다.”
고우는 자신도 모르게 창가에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그 프로토타입, 그러니까 ‘파이널하자드’가 ARK를 짊어지는 형태이기 때문에 녀석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기다란 머리만 솟아올라 슈퍼 소닉, 슈퍼 섀도우와 맞서는 정도였다.
너무 빠르고 번쩍번쩍 빛나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고우는 저 녀석들 중 어느 쪽이 소닉이고 어느 쪽이 섀도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계속 슈퍼 섀도우를 쫓았다.
고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뒤에서 체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걱정되는 건가, 고우?”
“아니. 이건 게임이잖아? 어차피 저 녀석들이 이길 테니까. 그런데……”
왠지 고우의 눈에 섀도우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떤 계기 때문인지, 섀도우는 마지막에 자신도 인류의 편에 서서 싸우는 걸 선택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은……
“저기, 넌 이 게임 엔딩도 본 거지?”
“그렇다.”
“그럼, 섀도우는 마지막에 어떻게 돼?”
“섀도우는-”
“됐어, 말 안 해도 돼. 알 것 같으니까.”
고우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참 웃기지.”
“……”
“우리 인간은 너희를 만들기만 하고, 결국은 모든 걸 뺏어가기만 하잖아. 그런데 왜 자꾸 인간을 구하는 거야? 우린 너희한테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고우.”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나랑 누나랑 신 형에 비해, 네가 너무 큰 희생을 했다는 생각? 난 그게 짜증나.
인간을 지키면 뭐해? 가면라이더가 인간을 지킨다고? 개뿔. 나도 신 형도, 너는 못 구했잖아! 왜 네가 모든 걸 다 짊어져야 해? 섀도우도 마찬가지야. 만약 여기서 누군가 희생되면, 그 첫번째가 섀도우잖아! 왜 맨날 너희가 우릴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거냐고!!!”
“고우, 목소리가 너무 크다.”
그제야 고우가 주위를 둘러봤다. 테일즈와 에이미, 루즈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그맨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차차.
“미안……”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고우는 체이스의 손목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다른 녀석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후, 고우는 체이스를 조금 거칠게 놓았다.
“고우, 난 가면라이더가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 때 내가 한 행동도.”
“누가 널 탓한대? 가면라이더든 뭐든, 너는 너잖아. 다만.”
고우가 체이스의 양쪽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슈퍼화하기 직전의 소닉처럼, 고우의 눈도 결의에 차 있었다.
“반드시 돌려받겠어, 체이스.”
“고우.”
“운명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난 반드시 너를 돌려받을 거야. 이런 꿈 따위 말고, ‘내 세계’에서. 반드시 되찾을 거라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체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 것도 같았다.
“기다리고 있겠다, 고우.”
그 때였다. 밖에서 괴물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그들이 서 있던 방이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마치 빠르게 하강하는 엘리베이터와 같은 감각으로, 귀가 먹먹해졌다.
“으악!!!”
“모두들, 뭐든 붙잡아라!!! 녀석이 추락한다!!!”
에그맨이 소리쳤다. 고우가 벽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잡자, 체이스도 그 손잡이를 잡으며 고우의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감각이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밖에서
“카오스-컨트롤!!!”
이 들릴 때까지는.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나타났다.
“뭐……뭐야?”
“순간 이동이군.”
체이스가 고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하강은 멈췄지만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나니, 서서히 잃었던 감각이 돌아왔다. 추락만 멈춘 게 아니라,
주위 환경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던 지구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고우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의 거리감 그대로. ARK가 ‘스페이스 콜로니’의 역할에 맞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때, 고우가 창 밖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검은 별 하나가 지구로 떨어지고 있었다.
“섀도우……섀도우!!!!!”
고우가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문득 귀에 섀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의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마리아, 이걸로 된 거지? 이것이 네가 바랐던 소원……”
“섀도우……!!!”
고우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른 다가온 체이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고우는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결국, 또 이런 결말이었다.
한참 후.
“Hey.”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체이스가 그쪽을 돌아봤다.
“소닉.”
“Yo.”
그제야 고우 역시 뒤를 돌아봤다. 소닉이 뒤에 서 있었다.
소닉이 고우를 보며 손인사를 해 보였다. 왠지 고우가 마하로 변신한 후 취하는 포즈랑 비슷했다.
“너랑은 제대로 인사를 못했네? 난 소닉! 소닉 더 헤지혹!”
“소닉……”
소닉이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생긋 웃었다.
“Hey, 기운 내! 그 녀석은 우리 모두를 구한 거라구?”
“……”
가까이서 소닉의 시원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녹색 눈이 어쩐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딱히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고우가 소닉에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 작은 고슴도치를 와락 끌어안았다.
“Hey……! ……괜찮아, 괜찮아……”
소닉의 몸이 움찔 떨렸지만, 곧 고우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고우가 황급히 소닉의 어깨를 떼어냈다.
“미, 미안! 놀랐지?”
“That’s all right! 그런데……”
소닉이 고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씨익 웃었다.
“너, 아까 보니까 정말 빠르던데? 돌아가면 나랑 한 판 어때?”
“한 판?”
“경주 말야, 경주! 달리는 거라면 나도 꽤 한다구?”
아니요, 아무리 ‘마하’ 라지만 너한테는 무리인데요.
그러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닉의 눈을 피할 수도 없어, 고우는 그냥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 때, 소닉이 뭔가 생각난 듯 외쳤다.
“아, 맞아! 찾던 건 찾았어?”
“응?”
“No way! 너, 잃어버린 게 있다면서? 그걸 찾아야 ‘네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냐?”
“무, 무슨 소릴-아.”
고우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뭘 어떻게 얘기한 거야, 이 녀석!!!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고우 본인이 생각해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는 티가 확 나는 것 같았다.
“그게, 어……찾았다고 할까……이제 슬슬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그래?”
대체 체이스가 설명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녀석들, 뭔가 이상하게 오해하고 있어!!!
그 때, 소닉이 고우와 체이스를 번갈아 보더니 씩 웃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소닉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소닉?”
“Hey, 잠깐만……”
소닉이 고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꼭 다시 만나길 바랄게, 그 녀석이랑.”
“뭐……!”
고우가 눈을 크게 떴지만, 소닉은 눈을 크게 찡긋거리며 물러나더니 손가락을 입가에 올렸다.
방금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마침 에이미가 소닉에게 달려들어 껴안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틈을 타, 고우가 체이스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아서며 속삭였다.
“대체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소닉한테?”
“대략적인 것만 설명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이 세계는 너의 꿈인데 꿈을 통해 네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아~하. 그런 거였구만.”
“고우?”
“아냐, 아무것도.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돌아갈 수 있지 않나?”
문득 루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그는 정말로……제랄드가 만들어낸 복수의 도구였을까?”
그러자 루즈 옆에 있던 소닉이 창 밖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녀석은 그 녀석이야. 목숨을 바쳐 저 별을 지켜준 고슴도치, 섀도우 더 헤지혹.”
그 때였다. 소닉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고우의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자리에 주저앉으려던 고우의 팔을 체이스가 얼른 붙잡았다.
“아……”
“고우!”
“쉿! 조용히 해.”
고우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미 이런 ‘꿈의 끝’을 많이 겪어봐서, 어느 정도는 요령이 있었다.
“돌아갈 때가 된 것뿐이야. 네가 말했잖아? 우린 이레귤러라고. 좀 도와줘. 나가게.”
“알겠다.”
다른 녀석들이 두세 명씩 모여서 잡담을 하는 동안, 체이스는 조용히 고우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문을 살짝 열고 나가기 직전, 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마침 너클즈와 마주보고 뭔가 얘기하던 소닉이 갑자기 그쪽을 돌아봐서, 눈이 딱 마주쳤다.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고우는 이내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소닉도 알겠다는 듯 윙크하고, 입모양으로 ‘Good Luck’ 이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타이밍 좋게 테일즈가 소닉에게 다가가며 ‘소닉, 이제 가자!’ 라고 말했다.
“고우, 몸은 괜찮나?”
“괜찮아. 그냥 좀 졸려……”
체이스가 고우를 복도 한구석에 앉혔다. 고우의 눈이 자꾸 감겼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소닉이
‘그 녀석은 그 녀석이야’ 라고 말한 게 일종의 엔딩 트리거를 당긴 것 같았다. 뜬금없지만, 소닉이 그 말을 진짜 게임에서 하는지도 궁금해졌다.
돌아가면 이 게임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고우가 간신히 체이스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체이스……반드시 돌려받을 거니까.”
그러자 체이스는 고우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믿고 있다, 고우.”
그 손을 마주 잡는 순간, 시지마 고우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문득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나더니, 마지막으로 소닉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디오스, 섀도우 더 헤지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