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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피해의 이상이 감지됩니다. 바로 그 날이었다. 관리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익숙하게 폐쇄되어 진입할 수 없는 복지팀에 원래 배치되어 있었던 직원들을 다른 곳으로 배치했다. 다른 세피라의 코어 억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원들은 처음엔 혼란스러워했었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는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니까.

“최악이야…”

“그게 그렇게 한탄할 일이냐? 뭐 임시로 배치되는 거구만 엄살은.”

“엄살이라고? 이게? 지금 복지팀 직원이 징계팀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이게? 말이 돼? 환상체한테 죽기 전에 여기 사람한테 죽거나 게부라님한테 살해 안 당하면 양반이지!”

“야, 나는 징계팀도 아니냐? 그리고 이번에 뼈 빠지게 굴러서 여기 세피라 멀쩡해졌던데 무슨.”

“입! 입! 세피라라고 막 부를래?? 왜 진작 눈치를 못 챘지? 이 회사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거야? 아무리 날개 중 하나라지만 그 전설적인 해결사를 고작 부서 하나 맡는 세피라를 시켰다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냐?”

“반죠, 너 해결사 출신이라며, 어떻게 붉은 안개를 몰라?”

“좀 모를 수도 있지.”

반죠가 두 손을 뒷머리에 가져다 댔다. 센토의 얼굴이 무지에 대한 경멸로 살짝 구겨졌다. 이 녀석 정말 해결사 맞긴 해?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를 스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진위를 따져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기에 센토는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그것보단 징계팀 직원과 친하게 지내는 복지팀 겁쟁이를 향한 맹렬한 시선부터 좀 어떻게 하고 싶었다. 이 망할 관리자! 아니 관리자님! 차라리 상층부로 올려보내 주세요! 아니면 중앙본부라도…. 하지만 한 번 떨어진 명령은 번복될 리 없었다. 입사할 때부터 복지팀에 있었던 것을 자신더러 어쩌란 말인가. 저 환상체 때려잡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센토는 당당히 반죠 가까이 딱 붙었다. 그리고 미미크리 슈트의 눈들과 뾰족한 뿔 비스름한 것들, 그것의 원형이 되는 환상체의 외형을 생각했을 때 보통의 뿔과는 달리 각질이 아니라 뼈로 이루어졌을 그것들을 피해 등 옷깃을 꽉 잡아 쥐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지혜라곤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그 경멸의 눈빛 정면으로 반죠가 마주 서도록 휙 돌려 방패 삼았다.

‘이러나저러나 겁쟁이가 될 거라면 차라리 할 수 있는 만큼 인맥을 이용해 먹어야지.’

대충 그런 심보였다. 일단 복지팀 완장이 저들의 눈에 띈 이상, 그리고 진작부터 반죠랑 좀 친하게 지낸 거로 이미 아니꼽게 낙인찍힌 이상, 뭘 어쨌든 간에 저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은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저들이 찌질하다고 보든 말든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은가.

“야, 반죠. 너 나한테서 진짜 한 발짝도 떨어질 생각 마라.”

“아니 갑자기 왜 이래?”

“가만히 있어 좀. 이렇게 된 거 오늘 내 일일 방패로 좀 있어.”

“내가 무슨 물건이야?”

키류 센토는 ‘적어도 이 회사는 우릴 물건으로 볼걸.’ 하고 말하려는 걸 어찌저찌 삼킬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반죠의 팔을 잡아다가 슬슬 뒷걸음질 치며 쫒아오지 않는 다른 징계팀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하며 말했다.

“모르겠으면 그냥 가만히라도 있어 이 바보야.”

“아니, 아까부터 자꾸 누구더러 바보래?”

“바보 맞잖아, 환상체가 튀어나오면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튀어나가선 무식하게 제압하는 게 바보지 그럼 뭐냐?”

“무식하게 안 튀어나가거든?!”

“무식하게 튀어나가거든. 관리자한테 직접 내려오는 명령이 아니면 무작정 다 잡아 패는 주제에.”

그리고 대충 도착한 환상체 격리실 앞에서야 그들은 뒷걸음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 격리실에 있는 환상체는 뭘까. 갑작스레 든 가벼운 호기심에 센토는 격리실 앞에 적힌 식별 번호를 한 번 살펴봤다.

“O-06-20. ‘아무것도 없는.’ 인가. 뭐, 네 꼴을 보면 여기 있는게 맞지.”

“너 지금 나 험담하냐?”

“아까부터 계속 험담하고 있었거든?”

“야! 이게 진짜.!”

거기까지 말한 순간에 갑자기 시설 내에 비가 내리기 시작헸다. 분명 이곳은 지하일 텐데. 그리고 들리는 직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형태의 웅얼거림. 그들은 ‘아, 이제 작업이 시작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른 경우엔 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그 웅얼거리는 소리는 세피라 코어 억제에선 늘 들려왔으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정의 시련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는 날이었으니.

“비가 내리네.”

“야! 말 돌리지 마!”

“……”

“야, 정신 나갔냐? 야, 센토!”

휘적휘적 그의 눈앞에 반죠의 손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젖지 않는 비를 가만 쳐다보고 있는. 그러자 그의 앞에서 붉은 것이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려고 하는 것을 반사적으로 피하고 나서 센토는 외쳤다.

“너 지금 미쳤어?? 그걸 왜 나한테 휘둘러!”

“아, 정신 차렸네. 네가 멍하게 정신 빼놓고 있으니까 그러지. 그러다 내가 껍데기가 되어도 못 알아차리고 잡아먹힌다?”

“너는 해도 꼭 그런 소리를 하냐? 관리자님만 찾는 괴물 정도는 분류하고 죽여줄 수 있거든?”

“그럼 됐어. 나 작업 들어간다.”

그리고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그 격리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하여튼 저 바보가.”

센토는 문 앞에 험담을 내뱉곤 슬금슬금 중앙본부를 지나 복지팀으로 이동했다. 세피라의 코어 억제 때문에 잠시 징계팀에 배치됐다지만, 어찌됐던 그의 소속은 여전히 복지팀이었고 그가 하는 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관리자님, 소속을 하필 징계팀으로 옮겨주실거면 다른 작업이라도 시켜주시던가요.”

그렇게 꿍얼거리며 그는 고요한 오케스트라의 관리실 앞으로 가 섰다. 작업 기피 대상 1순위라고 해도 손색없는, 까딱 잘못해서 연주라도 하러 나가면 티켓값을 늘 빡세게 걷어가는 바람에 지금까지 한 작업들이 다 무용지물이 되어서 다른 직원들한테 욕 한 바가지씩 얻어먹기 딱 좋은 환상체.

장수는 하겠다만 먹는 눈칫밥으로 수명 더 깎아 먹을 것 같은 환상체. 

“그래, 이걸 이 천재-!”

거기까지 말하고 키류 센토는 얼어붙었다. 이 다음이 뭐지?

“…이 천재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넘겼다. 뭔가 찝찝함이 있긴 했지만, 내가 천재라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키류 센토는 콧노래를 부르며 격리실에 들어갔다.

센토가 그렇게 환상체 격리실에 들어갈 때쯤 반죠는 ‘아무것도 없는’ 격리실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오늘의 센토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소에는 누가 어떻게 죽어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누가 자신에게 눈치를 줘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기나 했지, 이런 인간이 아니었는데.

그러자 그 붉은 안개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생각났다. 평소하고 다른 점이라곤 그 세피라 뿐이었으니까. 여기 세피라들은 어차피 다 깡통이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결사였던 자신의 과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그 세피라가 적당히 유명한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뭐? 내가 알아야 하는 인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한 번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의 기억이 없는 듯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난 여기 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지? 단지 키워드와 하얀 배경에 줄글로 이어진 듯한 과거. 마치 글을 읽는 것은 같아도 떠오르는 장면은 단 한 페이지도 없었다.

그때 아무것도 없는 환상체의 격리실 쪽에서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그는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신체 능력이나 청각, 후각 등등에 특출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거나 특이하게 보지 않았었다. 이 징계팀의 세피라인 게부라에게는 덕분에 저 괴물들의 탈출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다며 칭찬받은 기억도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들은 비명이 정말이라면. 반죠는 자신이 지나왔던 길로 달음박질쳤다. 가슴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당장은 제 기억의 기시감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발,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숨을 몰아쉬며 다다른 격리실 앞에서 마침 징계팀의 직원 한 명이 나오고 있었다. 반죠는 그를 잘 알지는 못했어도 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허… 허억… 야, 라미레즈. 너… 괜찮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관리자님! 관리자…”

그리고 수많은 껍데기들은 모두 ‘관리자님’만을 부르짖었다. 그의 눈앞에서 그것은 온갖 원인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소리를 내며 껍데기를 벗고 나왔다. 인간을 흉내내지만 결국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그 모습으로.

반죠 류우가는 지체할 틈 없이 붉고 기괴하고 눈앞의 괴물을 닮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당연히 그러했다. 그 무기는 눈앞의 저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다른 무기를 든 직원이 제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었겠지만, 도움을 부르러 간 사이에 이것이 더 큰 피해를 입히고 더 나아가 고치가 되어 무언가 기괴하지만, 사람과 비스무리한 형체를 가지게 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들이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네 번째의 내리침 이전의 맞은 공격이 평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이를 꽉 물었다. 적어도 내가 죽기 이전에 저것을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릴 수 있다면.

“아~ 역시 난 천재라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고요한 오케스트라의 관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겠어? 적정선 이내의 에너지만을 딱 충족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그 섬세함! 이렇게 유능해서야…”

2급 경보가 울리고 있는 회사의 상황과는 달리 키류 센토는 무사히 작업을 끝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그 특유의 제 자랑까지 해가면서. 하지만 그 앞에 놓인 것은 안타깝게도 칭찬과 격려가 아닌 난장판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패닉한 사람들 한 무더기와 환상체들 뿐이었다.

자랑스러운 깃털이자 로보토미의 관리직이라는 역할을 가진 이상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환상체의 제압. 긴 낫을 빼 들고 모든 것을 일어나기 전으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 

‘만약에 말이죠. 환상체로부터 마지막 에너지를 채워야 하는 순간에 직원 하나가 중대한 위험에 처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하지만 키류 센토는 그보다도 패닉한 직원들과 그렇지 않은 직원들의 구조를 우선했다. 

‘너무 기본적인 이야기라 되짚어줘야 할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관리자의 기본 수칙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거에요.’

온몸의 세포가 사람들을 먼저 구조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곳은 죽음에 한 줌의 애도조차 없는 로보토미이다. 이곳의 관리직들은 그들을 돕기보다는 환상체를 하나라도 더 잡아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은 달랐다.

‘직원들을 돌봐주는 보호자 같은 역할이 아니라.’

낫은 빙글빙글 돌고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그는 영민한 머리를 굴려, 가장 피해를 최소화하며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과 함께 차근차근 환상체들을 정리해나갔다. 그가 효율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싸워나가기 시작하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직원들은 뭉쳐 이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었다.

‘제가 당신을 오래 봐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인류애가 넘치는 분인지 미처 몰라봤네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선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중요했다. 죽은 이후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지금 상태가 괜찮은 사람 중에 적어도 WAW 등급의 환상체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부터 적어도 3명씩 무리를 이뤄 위험 개체가 적은 중앙본부 2팀부터 탈환하기로 하자. White 속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패닉한 관리직의 회복을 우선으로 해줘. 최대한 인원수를 늘려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져.”

모든 지시를 내린 후 키류 센토는 헤세드의 코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상체를 견제하며 직원들의 패닉을 해결하느라 꽤 많은 부상을 입은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순차적인 합류를 위한 치료. 가만히 앉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 상처가 아물어간다. 문득문득 그것의 원리는 어떻게 되는지, 이 회사를 뜯어서라도 알아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했다. 

“헤세드님, 지금 이 난장판이 일어난 간접적인 원인은 당신의 지금 그 모습과 관련이 있는 거죠?”

여전히 젖지 않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가진 기계는 여전히 들을 수 없는 쉬익거리는 소리만을 냈다. 그것의 작은 간격, 음의 변화, 그 외의 것들로 보았을 때 그것이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만 할 수 있었다.

“말이라고 알면 뭐해.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에라 모르겠다. 키류 센토는 그냥 벽에 바짝 기대 널브러지듯 앉았다. 남이 벽에 어정쩡하게 기대 앉힌 듯 모양새는 영 별로였지만, 몸 자체는 편했다. 그리고 하릴없이 내리는 비를 보았다. 그냥 홀로그램 같은 것에 불과한 비였지만, 시각적인 정보가 뇌를 자극해 오한이 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쐐기풀 양산이 지나갔다. 유일하게 이 복지팀에 제압되지 않고 남아 있는 환상체였으리라. 그리고 미처 낫을 잡거나 저지하기 전에 신입이었던 직원 하나가 제 무기였던 부리를 집어 들었다.

“이봐! 당장 그 무기 내려놔!”

하지만 이미 늦었다. 흑조의 꿈은 그가 아끼던 양산을 펴들어 그 탄환을 반사했다. 사람 하나가 죽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느껴지던 기시감이 명확히 밝혀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 자신은 비를 맞고 지금처럼 부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온 사람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 분명 여기에서의 기억이 아닌 그것들.

멀쩡해진 정신이 기괴함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복도에 쌓인 시체들의 산, 매일 코 밑에 감도는 피의 냄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곳은 매일 얼마만큼의 사람이 죽고 얼마만큼의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산 제물처럼 활용되는가. 정신의 과도한 각성이 일어난다. 거대한 낫은 바닥을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려는 그를 지탱했다. 당장에라도 죽어가는 이들에게 안전과 휴식을. 그는 악을 쓰며 달려나갔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그렇게 되어서야 무언가를 들을 수 있었다.

“비가 내리네, 이건 직원들의 눈물이야. 절대 그치지 않겠지.”

분명히 싸우러 뛰어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피도, 시체도 환상체도 없었다. 비도 내리지 않았다. 장소조차 복지팀이 아니었다. 새빨간 배경. 분명 이곳은 징계팀이었다. 이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 명백한 이상 현상. 이를 설명할 것이 필요했다. 자신 이외의 데이터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물어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야! 반죠!”

자신에게 다시 떠올린 기억이 있는 이상,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있는 이상. 이 이상한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이것이 단순히 착각으로 넘길 일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선 반죠 류우가 이상으로 적합한 인간은 없었다.

“너 내 말에 이상하다 어쩌다 토 달지 말고 대답해. 너, 뭔가 떠오른 거나 이상한 점 없어?”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내가 토 달지 말랬지. 빨리! 없으면 없다고 해도 되니까!”

“어… 이상한 점은 있어.”

“뭔데?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말해봐.”

“나, 왜 아직 살아있냐?”

“뭐?”

“그러니까, 난 어제 분명히 탈출한 그 껍데기 녀석이랑 싸우다가 정신을 잃었거든? 분명 라미레즈가 잡아먹혔는데, 지금 일어나보니까 저 녀석도 살아있고.”

의심은 그 순간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돌려진 그 느낌은 느낌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토끼의 귀가 쫑긋하듯 그의 머리카락 한구석이 바깥쪽으로 말려 튀어나왔다.

“저기, 있잖아. 오늘이 며칠이었지?”

키류 센토는 지나가고 있었던 징계팀 사무직 하나를 무작정 붙잡고 물었다. 갈 길을 막아서 짜증이 났던 걸까. 그 직원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떻게 대답은 해주었다.

“오늘이라면 □일인데.”

그는 웃으면서 해당 직원에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궁금증은 더더욱 치솟아만 갔다. 오늘의 날짜는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로보토미를 보고 있던 그 날짜였기 때문에.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그래서 뭐? 우리가 원래 있던 세계가 여기가 아냐? 그럼 뭔데? 외계인이라던가 뭐 그런 이상한 소리라도 할 셈이야?”

“외계인이라면 외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럼 우리 기억은 뭔데? 여기서 산 기억 멀쩡히 있잖아! 난 우주에서 오거나 한 적 없거든?”

“누가 우주에서 왔대? 저기 환상체 같은 괴물들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데 못 믿을게 뭐야? 애초에 세계랑 외계인의 계는 같은 한자거든? 바보냐?”

“바보라고 하지 마! 근육 붙이라고 근육!”

“왜? 다른 것도 아닌 그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어?”

마치 원하던 것을 이제야 가지게 된 아이처럼 눈꼬리를 휘어 웃는 센토가 반죠의 눈에 비춰졌다. 마치 이제야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빨리 생각해 봐. 그 단어를 고집할 만한 이유가 있어?”

“아니, 갑자기 생각해보라고 해도.”

“그럼 좋아.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보자고. 기억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뭐야? 어린 시절 기억 말이야.”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니까. ………”

“기억 안 나지?”

반죠 류우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세계에서 살았던 기억, 멀쩡하지는 않은 거지?”

“그으렇지.? 근데 이게 뭐. 그래서 이게 우리가 외계인이라는 증거야?”

“그렇다곤 말 못하지. 적어도 네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진. 그래도 이게 우리가 좀 특별하다는 증거는 되지 않겠어?”

“뭐가, 겨우 기억 좀 잘 안 나는 정도가? 과거를 잊고 사는 놈들은 여기 널리고 널렸어. 뒷골목 출신들은 자기 과거를 떠올리기도 싫을 텐데?”

“그럼 그 뒷골목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야?”

“뭐?”

“너 뒷골목 출신에다가 어떻게 악착같이 해서 해결사 됐다며. 잘 알 거 아니야. 어린 시절도 아니고 겨우 그 정도가 생각 안 나겠어?”

“허! 좋아, 내가 멀쩡하게 말하면 넌 정신 분석인지 좀 받으러 가봐라.”

반죠는 자신만만하게 미미크리를 바닥에 내리꽂고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뒷골목의 참담한 현실을 말해 주려 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말을 하기는커녕 입을 뗄 수도 없었다.

“이제 슬슬 인정하지 그래? 곧 작업 시작하겠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글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말해 봤자 혼란스럽기만 할걸.“

“그럼 그 기억이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본래 기억과 유사한 상황을 마주치니까 떠오르던데. 음… 뭐가 있을까… 아. 반죠, 너 거기 가만 서 있어봐.”

“응? 여기?”

반죠가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서자 센토는 그의 시점에서 등 정도가 보이는 각도로 섰다. 그리고 옷 어딘가에서 뭔가를 꺼내 허리에 장착하는 듯했다. 그리고 센토의 손에 들린 캔. 그리고 그것이 경쾌하게 따이는 소리. 반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

“야, 야야!!! 여기서 뭘 하려는 거야! 안 돼!”

“변신!”

“으아아악!”

반죠는 있는 힘껏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웃겨 죽겠다는 얼굴의 센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기억났어?”

“… 변신은?”

“바보야, 여기 드라이버도 보틀도 있을 리가 없잖아.”

“너 그럼 손에 든 캔은.”

“이거? 다 마신 웰치어스.”

“………”

반죠는 한동안 침묵했다. 센토는 그의 눈앞에서 푸른색 웰치어스 캔을 흔들고 장난식으로 낄낄 웃으며 역시 저는 천재라는 소리나 해댔다. 반죠는 곧 그 입을 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기억까지 떠올리게 하면서.”

그 얄미운 입에서 손을 떼며 반죠는 물었다.

“기억났으면 주위를 좀 봐.”

“주위를? 왜?”

“너는 이게 정상처럼 보여?”

그제야 반죠는 맑은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제 같은 오늘에 키류 센토가 본 것과는 다른 깨끗한 복도였지만 반죠 류우가는 센토의 말뜻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상은 아니지.”

“그럼 우리가 이제 할 일을 알겠네.”

“할 수 있겠어?”

“이 바보야. 우리 이미 한 번 세상 구한 적 있거든.”

“자꾸 바보 타령 할래?!”

“그럼 바보를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됐고, 뭘 하면 돼?”

“여기에서의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 내야 해. 난 개인적으로 여기 조사도 좀 병행할 거고. 그러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 방법으로 여기서 탈출시킬 수 있어.”

“최초의 기억? 그건 또 뭐야?”

“우리가 알고 있는 조작된 기억 말고 정말 여기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기억. 아마 우리가 잊고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여기 들어오게 된 계기를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운 좋으면 나가는 방법도 찾고?”

“웬일로 말을 잘 알아듣네? 이거 껍데기 된 거 아냐?”

“아오. 그래, 관리자님 어디 계신다냐. 아무튼 그 이외에는 뭐 없어?”

“그 이외에… 있지.”

“있으면 빨리 말해.”

“죽지 마.”

갑자기 퍽 진지해진 목소리였다. 다시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선명히 들리는 일종의 절규와 함께.

“죽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전의 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기 사람들은 이곳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어. 그러니까 죽지 마.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 할 수 있지?”

“누가 할 소리를. 너나 잘 해.”

그 퉁명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이내 그 둘은 피식 웃었다. 이전,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주었던 그 미소. 그들은 다시금 또 다른 세계를 구제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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