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으로 뇌리에 남았던 잔상은 길바리스로 추정되는 파편에 손을 얹자 터져 나오는 섬광에 하얗게 번진 시야였다. 이후로 까맣게 정전되어 잡음만 떠다니던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다시 깬 건 사락사락 모래를 밟는 느린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몰려오면서부터였다.
곡식을 모두 실하게 여물도록 만들고 남을 만큼 선명하게 내리쬐는 가을 햇빛에 부신 눈을 뜨기란 쉽지 않았다. 손 그늘로 차양을 쳐서 이마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서야 간신히 아른거리는 색수차를 보정할 수 있었다. 서너 번 깜빡거린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나서 대충 이곳이 어딘가의 해변이리라 짐작했다. 딱히 느껴지는 살기도 없었고 위협이 될 만한 생명체도 보이지 않아서 살굿빛으로 부서지는 고운 모래를 짚으며 일어나려던 때였다.
“정신이 들어?”
제가 여기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당황해서 하마터면 그대로 다시 고꾸라질 뻔 했다.
“네가 왜 여기에…?”
깨울 생각은 않고 근처에 앉아 한가롭게 라무네를 홀짝이고 있던 너는 내가 다친 데 없이 잘 움직인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온 지 일주일 쯤 됐어.”
“일주일?”
“응. 오늘 T.K.씨가 온다고 그랬으니까… 맞을 거야.”
다 마신 병을 거꾸로 뒤집어서 탈탈 흔들어 확인한 뒤에 주섬주섬 반대편 주머니 속으로 쏙 넣었다. 정확히는 실체가 없는 주머니 속에. 언뜻 봤을 때는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 같았지만 그랬더라면 그 큰 유리병이 톡 튀어나와있어야 했는데 시치미라도 떼듯 라무네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물론 그게 거기에 들어갈 리도 만무했지만.
나름 오래 살면서 별별 꼴을 다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전 처음 목도한 불가사의한 일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어느 새 너는 아래는 청녹빛 줄무늬가 큼직하게 들어간, 착 달라붙는 검은 반바지를 입고, 위에는 하얀 바탕에 물방울 모양의 넓적한 잎사귀가 곳곳에 찍힌 하늘빛 잠수복을 걸친 뒤 지퍼를 올려 잠그고 있었다. 그러고선 살짝 위를 올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번에는 아까 있던 허공의 주머니에서 낚싯대를 번쩍 꺼내들었다.
노란 테를 두른 녹색 손잡이 끝에는 주황색 대가 뻗어있었는데 끝에는 같은 색을 두른 앙증맞은 오리 인형 찌가 달려있었다.
“자, 이제 가자.”
그걸 내게 건네고선 너는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뚜벅뚜벅 앞장섰다.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모르는 게 찜찜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생소하디 생소한 낯선 곳에 아는 거라고는 너 하나뿐이었으니 딱히 믿음이 가진 않더라도 따라가는 수밖에.
햇볕이 얼기설기 짜서 던진 하얀 그물에 걸린 바다 내음을 찰박이고 종종걸음으로 사박사박 모래사장에 길게 발자국을 남기며 간 곳에는 조그마한 부두가 있었다. 뗏목 정도나 정박할 수 있을 만큼 정말 작았지만 낮은 계단 두 개를 밟고 올라가면 바다를 향해 늘어선 적갈색 판자의 행렬로 보아 부두이긴 했다.
“여기서 낚시하고 있어.”
“너는?”
“잠수하러 다녀올게. 떡밥은 이거면 충분하겠지.”
음식이라면 가게에서 사먹고도 남을 녀석인데 직접 어로 활동에 나서는 거 보면 여긴 무인도인 건가. 하지만 라무네가 있다거나 잠수복을 별도로 구비해둔 걸 보면 어느 정도 경제 활동은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부둣가에 걸터앉아 파란 물고기가 그려진 떡밥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그란 점이 콕 찍힌 물고기가 퍽 귀여웠다.
차르륵 뿌려진 떡밥이 수면 위에 사뿐히 앉아 스르륵 녹아 들어가기까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작은 지느러미가 뾰족 솟은 팔뚝만한 그림자가 두둥실 떠올랐고 이때다 싶어 머리 쪽으로 방향을 잘 맞춰 한 손으로 낚싯대를 휙 던졌다.
그 사이 부두 입구로 돌아간 간 너는 심호흡을 한 뒤 힘차게 뜀박질을 하며 부두 끝에서 도약했고 허공에서 시원하게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 풍덩 입수했다.
“틈만 나면 목욕하러 가더니 이젠 묘기까지 부리네.”
열심히 두 발을 놀려가며 바다를 헤엄쳐 나아가는 너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첫 번째 물고기를 놓칠 뻔 했다. 다행히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완전히 잠긴 찌를 바로 확인했고 줄이 끊어질 만큼 팽팽한 교전 끝에 물고기를 덥썩 문 오리가 물방울을 날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응? 이건…」
실루엣은 그렇게 커보이진 않았는데 덩치가 꽤 되는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를 받기 위해 나도 모르게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옷~!!!」
「고래상어를 잡았다! 엄청 크다!」
족히 내 키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고래상어가 품 안으로 안착했다. 진회색 몸통에는 옅은 잿빛 점과 줄무늬가 번갈아가며 고루 박혀있었고 너부데데한 얼굴에는 둥그런 두 눈과 넓적한 입이 멍한 인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이리도 싱싱하게 펄떡거리는 녀석을 들고 가려면 아무래도 해체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멍하게 넋을 놓고 있는 얼굴과 지그시 마주하고 있으니 그렇게 할 의지가 뚝 꺾여서 고민하던 찰나, 절로 몸이 움직이며 나도 마찬가지로 허공의 주머니에 고래상어를 집어넣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마음 한 켠이 든든한 게 그대로 사라진 건 아닌 듯해서 다시 자리를 잡고 낚시를 이어나갔다.
너는 주고 간 떡밥이 다 떨어질 즈음에 얼추 맞춰서 돌아왔다. 무얼 한가득 잡아 왔길래 표정은 스노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뭍에 오를 때부터 벌써 통통 뛰어오는 모양새에는 흥분과 신남이 묻어났다.
“이거 봐봐, 쟈그라. 가리비 주고 받아왔어!”
너는 왼발을 앞으로 딛으며 척- 하고 하늘 향해 뻗은 손으로 영롱한 진주를 든 채 반짝이는 눈으로 자랑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오래토록 간직한 오색빛깔 비밀을 품고 무럭무럭 자라난 모래알은 하이얀 햇빛을 고운 손짓으로 받아 수줍게 광택으로 둘렀다.
“그렇게 귀한 걸 받아왔다고? 누구한테서?”
“털모자를 쓴 분홍 해달 아저씨한테서. 잡은 가리비랑 물물교환 해주러 와. 그래서 받았지.”
바다의 정수까지 내어주며 바꿔갈 만큼 가리비가 맛있는 진 의문이었지만 각자 소중한 게 다르니 그런가 싶었다. 뭐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누구나 경이로움에 휩싸이는 빛의 전사라는 녀석의 취미가 목욕이라 하면 누가 믿겠거니 싶다만.
요리해서 먹지도 못하는 진주를 어디에 쓸 요량인 건지 싶었는데, 다름 아닌 낚시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는 내게 보란 듯이 건넸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뭔 소리야. 내가 무슨 괴도도 아니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 대신 네 손에 들린 진주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대로라면 내가 받아주기 전까지는 미동도 없이 버티고 있을 것 같아 마지못해 등을 떠미는 손길에 응했다.
내가 이것저것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데 능숙하니 저보단 유용하게 잘 쓰리라,
아마 그리 생각하고 준 것이겠지.
네가 진주에 무슨 꿍꿍이를 발라놨다거나 그럴 녀석이 아니란 건 잘 알기 때문에 허튼 수작을 벌여놨다는 의심은 일말도 없었지만 그저 선물이라는 자체가 생소하고 어색했다. 그간 너처럼 오며가며 엮일 인연도 없었으니 당연히 사소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줄 일도, 받을 일도 없던 탓에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 건지 몰라서 저절로 경계부터 하게 됐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미지의 존재에게 이빨부터 번뜩이며 온 근육을 곤두세우는 야수처럼.
게다가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주고받을 만큼 낯간지러운 사이였다고.
모래사장을 벗어나 누런 잔디밭으로 폴짝 넘어가는 네 뒤를 따라가며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던 진주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나중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니까.
아침나절에 나는 낚고 너는 잠수해서 잔뜩 잡은 해산물을 「너굴상점」이란 가게에 가서 모두 팔았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너굴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합니다-!」
콩돌이와 밤돌이라는 쌍둥이 너구리가 운영하는 잡화점이었는데 씨앗부터 냉장고까지 안 파는 게 없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호박밭으로 가자.”
상품과 금전이 오고 가면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만족스러운 거래였는지 두둑한 돈주머니를 챙기며 부지런히 다음 장소로 이끄는 발걸음이 들떠있었다.
“갑자기 웬 호박?”
“곧 할로윈이니까 상점에서 모종을 팔길래. 그걸로 이것저것 만드는 재미도 있어.”
“흐음- 나한테도 만들어 줄 거지?”
“…그래, 좋아.”
밭으로 향하는 길에 놓인 나무를 하나씩 흔들어보며 가는 네 뒤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흘리듯 던진 부탁이었는데 딴 데 정신을 두고 있어서 그렇지 받아주긴 해서 내심 살짝 놀랐다. 즉흥적으로 불쑥 들이민 도발에 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니까.
저러고서는 나중에 까먹을지 아니면 기억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나저나 나무에 뭐가 있길래 저리도 열심히 확인하고 있는 거야. 떨어지는 거라곤 나뭇가지밖에 없는데. 사서 고생은 네가 하는 거니까 구태여 말리진 않는다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기 분주한 네 꽁무니를 유유자적 따라가며 낙엽이 지나가던 바람을 한 움큼 붙잡아 비벼서 내는 가을빛 파도 소리를 눈에 담았다. 겨울을 앞두고 불그스름하게 단장하여 한껏 멋을 낸 이파리들이 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서 명랑하게 웃으며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구태여 제철 과일을 입 안 가득 베어 물거나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지 않더라도, 이렇게 풍성히 피어난 단풍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감겨오는 가을의 정취에 두둥실 떠오른 마음도 울긋불긋 물들었다. 당분간 여기서 머무르며 쉬어가는 것도 좋다는 생각까지 차오를 만큼.
“쟈그라…”
“왜?”
가을바람으로 한껏 풀어져 한가로움에 저를 맡기고 있던 날 쿡 찔러 터뜨린 건 다름 아닌 다급하게 부르는 네 목소리였다. 어느 샌가 흔드는 행위를 멈추고 섬광보다 빠르게 뒤돌아선 네 뒤에는 무언가 떨어져있었다. 정확하게 나와 마주친 두 눈은 미세하지만 좌우로 떨렸고 긴장감을 스멀스멀 풍기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주지 않고서 너는 딱 한 마디를 외쳤다.
“뛰어!”
“뭐?”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널 보며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이런 순간에서 살아남는 방법에는 통달한 본능이 너를 따라서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풀밭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질주 사이로, 잡히면 뒤통수가 따끔해질 것 같은 소리가 붕붕 들려오기에 귀를 기울여보니 얼추 상황이 가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벌에게 쫓기고 있다는 현실이. 그것도 무시무시한 마릿수로 꾸려진 벌떼에게.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서 침을 바짝 세운 채 날아오는 성난 추격자들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어 불러도 요도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문제가 생긴 건지 검의 존재는 느껴졌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깨지도 못하는 벽을 붙잡고 거세게 두드리며 일어나라고 소리 없는 메아리만 지르는 것보단 발을 더 빨리 놀리는 편이 생존에 가까워지는 지름길이었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좁혔다 벌렸다 하며 한이 맺힌 추격전을 한바탕 벌이고 나서야 여태껏 공들여 쌓아온 노력을 한순간에 잃고 만 이들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괜찮아? 어디 쏘인 데는 없고?”
“누구 때문에 이 사단이 난 줄은 알지?”
습관적으로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다시 채워 넣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분명 그렇게나 정신없이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힘을 소모했다는 감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또한 여기로 오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인 건지 신기한 마음에 주먹을 여러 번 쥐었다 펴봤다.
“……쟈그라.”
“또 왜?”
아까 그 주머니도 그렇고 이곳은 내가 알던 현실과 닮았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요소들도 섞여있는 공간 같았다. 해와 바다, 그리고 고래나 가리비와 같은 생물부터 알차게 영글어 있던 사과나무까지 지구에서 눈에 익도록 봤던 현실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어떤 물건이든 자유자재로 들락날락하는 허공의 주머니나 네게 진주를 주고 갔던 수상한 해달 같은 부분은 묘하게 현실의 범주에서 어긋나있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돌아다녔어도 가보지 못한 별이 넘칠 만큼 우주는 끝이 없으니 그런 곳이 하나둘 정도는 있을 법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상했다.
“뛰어.”
“무슨 소리야?”
“뛰라니까!”
여긴 어떤 혹성일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또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뛰라는 네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음박질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막힘없이 내달렸어야 했지만 아직 이곳 지리에는 미숙한 탓에 얼마 가지 못하고 절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뒤를 돌긴 했지만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눈앞에 핑그르르 떠오른 별은 암전된 시야 속에 깜빡이는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렴풋이 콧속을 간질여오는 싱그러운 흙 내음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허리를 숙여 밭에서 딴 알록달록한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어떤 거는 주황색, 또 어떤 거는 노란색이나 초록색. 튼튼한 줄기에서 똑 떨어지는 걸 보아하니 열매로 추정되는 그것은 심지어 하얀색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호박밭에 간다고 그랬었지. 거기에 와 있는 건가.
꿈이라도 꾼 것 같은 비몽사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두어 번 저어 턴 뒤 옷을 추스르며 일어나자 어느 새 호박을 모두 수확한 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깼어?”
“아까 그건 뭐였어?”
“어, 전갈.”
“전갈?”
“나도 전에 쏘였었어. 아픈 데는 없지?”
잠깐 기절하긴 했지만 몸 곳곳을 훑어봐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목숨을 앗아갈 만큼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라면 상당한 맹독이라는 뜻일 텐데 부은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다.
“뭐, 그런 것 같은데.”
아까 뇌리에 녹화해둔 기억을 되감아 여러 번 다시 틀어 봐도 영 찜찜하긴 했지만 건강에 문제는 없으니 괜찮은 거겠지. 며칠 지난 너도 그리 쌩쌩한 걸 보면.
“자, 그럼.”
상태를 확인하는 짤막한 문답을 마치자마자 너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손짓을 취하더니 이내 물뿌리개를 번쩍 꺼내들었다. 오리 찌가 달린 낚싯대에 이어 이번에는 코끼리 모양의 물뿌리개가 등장했다. 당연히 위로 둥글게 솟은 긴 코에서 물줄기가 갈래갈래 나오는 구조였는데 이건 또 왜 이리 앙증맞은 건지. 여기 물건은 원래 이렇게 하나같이 귀여운 건가.
“호박에 물 좀 주라.”
“나 방금까지 쓰러져 있었거든?”
“괜찮아, 괜찮아.”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물뿌리개를 쥐어준 채 호박밭으로 날 밀어 넣는 네가 어찌나 괘씸하던지. 동그란 눈을 찌푸리고 이유 모를 화를 내고 있는 붉은색 코끼리 물뿌리개가 내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저 무뚝뚝한 놈과 이런 사소한 일로 기 싸움을 펼쳐봤자 나만 애먼 짓하는 꼴이 돼서 지금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호박도 키울 줄 알았냐?”
“내가 한 건 별로 없어. 모종만 심고 기다리면 돼.”
“다 자라려면 얼마나 걸리는데?”
“이틀 정도? 물 주면 더 많이 자라.”
“참 성격 급한 호박이네.”
너 한 줄, 나 한 줄, 서로 사이좋게 한 고랑씩 맡아 정성스레 물을 뿌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내일도 올 터인데 오늘을 보내야 하는 게 아쉬운 듯 수평선에 걸터앉은 노을이 가볍게 물장구를 치는 바람에 하늘은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DIY를 하러 마을 안내소에 들르자는 네 말에 우리는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들판을 자근자근 밟아가며 군청빛 지붕 옆에서 초록색 나뭇잎이 그려진 깃발이 살랑살랑 나부끼는 벽돌 건물로 향했다. 금박을 입힌 손잡이를 밀어 고풍스러운 갈빛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곳곳을 원목과 목재 가구로 꾸며서 따듯하면서도 정겨운 사무실 풍경이 펼쳐졌다. 왼편에는 물음표 마크가 붙은 큼직한 상자가, 오른편에는 깃발과 같은 문양을 가진 ATM이 있었고 정면에는 파아란 원형 의자가 긴 책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책상 너머로는 두 사람이 일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진녹색 점퍼를 입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너구리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하얀 코스모스 두 송이를 수놓은 주홍색 스웨터의 개였다.
은방울이 달린 붉은 머리끈으로 몽실몽실하게 머리를 올려묶은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분을 이모저모로 살펴보고 있었다.
「너굴의 작업대를 빌려서 DIY를 해볼까?」
DIY 작업대에는 하얀 십자선이 균일하게 펼쳐진 커팅매트를 비롯한 직각자, 연필, 그리고 망치 등 각종 도구가 놓여있었다.
「……을 만들까?」
너는 소장 중이던 레시피 목록을 뒤적이며 어떤 게 좋을지 고심하다가 결심이 섰는지 곧 필요한 재료들을 우르르 쏟아놓고 뚝딱거렸다. 먼지 구름까지 폴폴 일으키며 뚝딱거리던 너는 마침내 무언가를 완성해서 의기양양하게 들어올렸다.
「할로윈 지팡이를 완성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마법이라도 부릴 수 있는 건가 싶었지 정확히 무엇에 쓰는지 용도는 몰랐지만, 금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감긴 막대 꼭대기에 해맑게 웃는 호박이 장식되어 있었다.
저 둥그런 눈매에 청녹빛 섬광만 감돈다면 꼭 내가 마인일 때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끼는 건 아무래도 기분 탓이겠지만.
“이거 받아.”
“왜 나한테 주는데?”
“만들어 달라고 해서.”
아, 그랬었지.
늘 그렇듯 이번에도 깜빡하겠지 싶어서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터라 뜻밖이었다. 먹는 거 외에는 무뚝뚝하게 구는 너도 가끔은, 정말 가끔이지만 이렇게 챙길 줄 안다는 거에 새삼 놀라서 당황한 기색이 드러날 뻔 했지만 둔한 네게 들킬 새랴 재빨리 일부러 과장시킨 능청스러움으로 겹겹이 포장해서 감췄다.
“이런 걸 다 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감사히 받아두지.”
안내소 밖으로 나오니 완연해진 밤하늘에는 짙게 내려앉은 저녁이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린 은하수를 부어 넘실거릴 정도로 채우고 반으로 곱게 쪼갠 달을 곱게 부수어 만든 별을 살살 뿌려 얹어서 은은하게 빛나도록 장식했다.
“예쁘지 않아?”
“응, 그렇네.”
때로는 별을 몇 개나 수놓았을까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며 헤아려보는 순간을 사치 부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찰나, 유성 하나가 반짝 빛을 발하며 별바다를 가르고 나타났다.
“앗, 빨리 소원 빌어야 해.”
“언제부터 그런 걸 믿었다고.”
“그래도, 얼른.”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유독 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누리려 들었다.
‘누구나’라는 사람들 속에 자신은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평범한 하루를 보내려고 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며 그렇게 지나가는 누군가의 하루로 지내고 싶어 했다.
이런 곳에 와서 그런 걸까, 갑자기 그러는 네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너를 따라 눈을 감고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꼬리를 그리며 저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에게 소원을 빌었다.
나중에 나조차도 무엇을 빌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원을.
이쯤이면 소원을 다 빌었겠지 싶어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밤하늘 아래 펼쳐진 호수는 그대로였지만 그곳으로 이끌었던 길바리스의 잔해도, 너도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이물감이 느껴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잭오랜턴 모양의 막대 사탕이 들어있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어디선가 또 다시 보겠지.
그 때 보자고, 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