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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재판1~3(주로 1-2, 3-1)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호사 빙고는 제로원 21,22화에 출연합니다.

 

 

그것은 제가 변호사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을 때의 이야기이죠. 먼저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저는 변호사 휴머기어 변호사 빙고입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휴머기어를 각 직업들에 배치하여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고 히덴 사의 전 사장님께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전 모든 법률과 판례를 암기하여 순차적으로 찾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높은 확률로 상대의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 효과적인 변호를 위한 설계이겠죠. 하지만 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휴머기어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변호 의뢰를 거절당했습니다. 전 쓸모가 없다는 걸까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재판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정에 사로잡혀 판단에 오류가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의뢰인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오랜만에 제게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승산이 적다는 이유로 여러 변호사들에게 거절당해서 저한테까지 오게 된 거였습니다. 의뢰인을 처음 본 순간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무죄라는 것 을요. 그러니 의뢰인의 무죄를 제가 증명해야만 합니다.

 

어느 날입니다. 재판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제 책상 앞에 낯선 명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루호도 법률사무소 나루호도 류이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루호도?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머기어는 아니겠죠. 휴머기어에게 성은 없으니까요...

 

이제부터가 기이한 일의 시작입니다. 명함을 집어든 순간 저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가면 제가 궁금했던 점을 알 수 있을 거라고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물었으나 답은 없더군요. 정신을 차리자 낯선 곳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사무실에 있었는데 제가 있게 된 곳은 평소와는 다른 곳이었습니다. 저 멀리 아까 보았던 명함 속 이름이 적힌 간판이 보입니다. 그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이 곳에 휴머기어는 없나 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문 앞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로 오게 된 걸까요? 어쩌면 제가 아는 이 세계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크를 하자 긴 검정 머리를 한 소녀가 문을 열었습니다.

"혹시 의뢰를 하러 오신 건가요?"

"의뢰는 아닙니다만... 변호사님께 용건이 있어서요."

고민하던 소녀는 제 자켓에 붙어있던 변호사 뱃지를 보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변호사 님을 불렀습니다.

"나루호도!!! 얼른 나와!"

친근한 듯 변호사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서 유대가 느껴졌습니다.

"잠시만 마요이!"

다급한 듯 외치는 변호사님의 목소리... 잠시 기다리자 변호사 님이 나왔습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그는 저와 같은 파란색 정장에 변호사 뱃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친근감이 듭니다.

의뢰인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그도 제 자켓에 달려있는 뱃지를 본 후 고개를 약간 끄덕였습니다. 그도 변호사이니 이 뱃지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어느 날의 일이다. 오늘도 의뢰인을 기다리며 사무실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또 그러고 있어?"

이 목소리의 주인공 마요이는 내 선배이자 스승 치히로씨의 동생이다. 내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인 치히로 씨는 모든 면에서 어설펐던 나에게 변호사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이 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치히로 씨가 살해당한 날 마요이는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있었다는 이유로 용의자로 체포당했다.

그 당시 신참 변호사에 불과했던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잠시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고 좌절한 마요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그러한 고독을 느꼈다. 그러니 마요이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내가 변호사가 된 건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였으니까… 결국 난 마요이를 구하기 위해 이 사건에 뛰어들었다.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사건을 해결하여 마요이의 누명을 벗겼다. 현재 마요이는 내 법률사무소에서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너 역시도 심심한가 보구나. 하지만 오늘은 누군가 올 기미는 안 보이는데...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심심해도 참아."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마요이의 뚱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약간은 미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마요이와 대화하고 있는 걸까?

"나루호도, 얼른 나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쩌면 새로운 의뢰인이 온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으로는 당장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만 마요이!"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의뢰인 님.

 

남색 정장에 하늘색 넥타이를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번 의뢰인은 이 사람인 걸까…

그는 나에게 자신은 의뢰인이 아니라며 다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자켓에 달려있는 뱃지를 보니 그도 나와 같은 변호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 걸까…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걸까…

 

첫번째 질문부터 정곡을 찔렀다.

"의뢰인을 믿는다고요? 당신은 어떤 근거로 그럴 수 있는 거죠?"

난해한 질문이어서 나도 모르게 길게 뻗친 머리를 긁었다. 이런 질문을 처음 듣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의 상대는 평소와 달랐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의뢰인을 끝까지 믿는다. 그게 제 스승님이 알려주신 가르침이니까요."

내 앞에 있는 건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히덴 사에서 만든 휴머기어이다. 휴머기어란 인간을 돕기 위해 히덴 사의 전 사장인 히덴 코레노스케 씨가 만든 인공지능이 탑재된 인간형 로봇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휴머기어는 변호사 목적으로 설계된 변호사 "빙고"이다.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으나 본인이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으니 그렇구나라고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있던 세계와 다른 것 같다고 말했으니까… 확실히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세계라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내게 오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에게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고 누군가가 그랬다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당신은 진실을 어떻게 파악하죠? 저는 음성 파형 혹은 표정 변화를 인식하여 거짓말을 하는 지 안 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이런 능력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의뢰인을 믿을 수 있나요?"

그런 방법을 통해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니... 꽤 편리하잖아. 잠깐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언제나 진실인지 아닌지 파악해야만 했다. 범인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피고인, 증인, 때로는 의뢰인까지 나에게 진실을 숨기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의뢰인을 믿는 건 아마 그 사건 때문이겠지.

“말하신 대로 저는 평범한 인간이죠. 저에게 그런 능력이 없어요. 사람들은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의뢰인을 믿는 건 스승 치히로 씨의 말 때문일 거에요. 제가 치히로 씨를 처음 만난 건 제가 피고인이 되어 치히로 씨를 저의 변호사로 만난 일 때문이었어요. 그 때의 전 변호사를 지망하기만 했을 뿐 어리버리했고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죠. 치히로 씨에게 도움이 되긴 커녕 불리한 진술들만 했었어요. 그러니 절 굉장히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런데 치히로 씨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괜찮아, 나루호도 군. 나를 믿어. 네가 어떤 증언을 하더라도 난 너를 믿어. 마지막까지 나루호도 군을 변호해 줄게.’

저는 그 때 느꼈죠. 이 분을 따라가면 제가 되고 싶은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라고요. 제가 되고 싶은 변호사는 이런 존재였으니까요.”

“즉… 나루호도 씨가 변호사를 지망하게 된 이유는 스승 치히로 씨 때문이었다는 거군요. 전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가 되어야 했기에 그런 감정은 알 수 없었네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어두워 보였다. 단순히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였다.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니… 그런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한 모든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내가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모두의 도움 때문이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엄청난 힘이 되었으니까…

“저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으니까요. 치히로 씨가 저에게 해주신 말 중에서 이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나요.

‘피고가 유죄일까? 무죄일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믿어주는 것 뿐. 그리고 그들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과 같죠.’

그러니 빙고 씨도 자신을 믿으세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고민한다는 건 성장할 수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이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가 어느 때보다 가장 놀랬던 건 재판이 3일 안에 끝난다는 이야기였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있었던 곳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무고한 이들이 피고인이 되는 경우도 많고 자신의 범죄를 다른 이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거짓 진술을 하는 일들도 빈번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착잡한 표정을 지은 거였을 거다.

내 이야기를 듣는 그는 한없이 진중했다. 그런 진지한 모습에서 나는 그가 훌륭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달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 충분히 뿌듯하였다.

 

 

 

나루호도 씨와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 곳이 제가 있던 세계와는 다른 곳이라고 믿게 된 건 재판이 단 3일 동안만 진행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 안에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 곳은 제가 있던 세계와는 다르다는 걸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고한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는 일들이 꽤 많다는 것도요. 제가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건 속상한 일이었습니다.

전 처음에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도 의뢰인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 또한 너무 추상적이었으니까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그를 쉽게 믿을 수 없었고 심지어 무모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데이터 때문만은 아닙니다. 확실히 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뿐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전까지 의뢰인에 관하여 저런 확고한 믿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제 생각을 바꾸었죠.

 

다음날 그의 배려로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법정에서의 나루호도 씨는 빛났습니다. 때로는 어설픈 논리에, 때로는 자신의 추리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어설프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나루호도 씨의 진심과 열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뢰인을 끝까지 믿으려 하였습니다. 시스템에 의존했던 저와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신뢰하지 못했던 걸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온전한 편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나루호도 씨의 이야기대로 의뢰인을 끝까지 믿어서 그의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고... 그것이야말로 변호사의 일이라고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뢰인을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변호사의 일... 그리고 그들을 믿는 것이야말로 저를 믿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저도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그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어떤 힘든 순간에도 앞을 향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든 순간일수록 뻔뻔하게 웃어야 한다는 것과 위기일 때에는 발상을 역전시켜서 해결해 나가라는 그의 스승 치히로 씨로부터의 가르침을 저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에…

눈을 다시 뜬 순간 전 다시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그 풍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나루호도 씨의 명함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분명 명함을 집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루호도 씨와 한 대화도 기억하는데, 재판을 참관했던 기억도 나는데 모든 것이 꿈이라는 듯 저는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휴머기어도 꿈을 꿀 수 있을까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만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그 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뮬레이션이 완료되었습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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